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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마당 (2018년 11월호)

 

  세월의 시험을 견딘 『순전한 기독교』의 생애
  조지 M. 마즈던 『C. 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 전기』 홍성사 2018

본문

 

어느 누군가에 대한 전기나 평전, 혹은 연보나 연대기라고 하면 그 개념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잡힌다. 그런데 이 책을 잡아본 순간 ‘누구에게, 어디에, 또 무엇에 관심을 두고 읽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이 생겼다. 가령 ‘『순전한 기독교』로 본 루이스의 생애’라는 제목의 인물에 대한 전기가 아니라 책에 대한 전기라니 그런 물음이 머릿속에서 맴돈 것이다. 이런 선입관을 뒤로하고 책 첫머리의 ‘감사의 말’과 ‘차례’를 보면서 이 책을 어떻게 읽을지 그 답을 겨우 찾을 수 있었다. 여기서 찾아낸 것은 『순전한 기독교』의 쓰임새이다. 그렇다면 먼저 그 쓰임새를 살펴보자.

종합선물세트라 할 수 있는 이 책의 구성과 쓰임새
『C. 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 전기』의 저자 마즈던(George M. Mars-den)은 “전 세계에서 C. 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가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에 대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그 결과물을 C. S. Lewis’s Mere Christinanity: A Biography(2016)로 내놓았다. 그간 루이스의 저작과 관련된 책을 우리말로 옮기고 펴낸 이 책의 번역자 홍종락은 ‘옮긴이의 글’에서 이 책이야말로 『순전한 기독교』의 종합선물세트와 같으며, 이 책의 8장 “『순전한 기독교』의 불후의 생명력”을 읽으면 루이스의 추종자들이 막연하게 느낀 바를 명쾌하게 정리해준다고 설파한다. 그렇다면 이 책은 왜 종합선물세트라 여겨지고, 이 책이 명쾌하게 정리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은 ‘서론’부터 ‘4장-예기치 못한 고전’까지를 1부로 볼 수 있다. 이 부분에서는 『순전한 기독교』의 탄생에 대한 배경을 ‘전시 노역’, ‘방송 강연’, ‘사랑받거나 미움받거나’, ‘예기치 못한 고전’ 등의 이름으로 다룬다. ‘5장-복음주의 영향권 안으로’에서 ‘8장-『순전한 기독교』의 불후의 생명력’까지는 2부로 여겨진다. 이 부분은 루이스의 책이 어떤 파장과 영향력을 지녔는가를 기술하고 있다. 이 책의 주요 독자는 누구였으며(5장), 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고, 교파와 지역을 넘어 열독하는 이유(6장), 그리고 이 책에서 집요하게 비판받는 예수에 대한 ‘삼중 딜레마’에 대한 비판과 응답, 시대적 한계를 드러내는 젠더의 문제(7장) 등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8장에 이르러서는 “왜 이 책, 『순전한 기독교』는 1940년대와 1950년대에 나온 거의 모든 논픽션 책들과 달리 사람들에게서 잊혀지지 않을까?”를 묻고 지난 수십 년간 많은 논평자들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일곱 가지로 정리하였다.

1. 루이스는 시대에 매이지 않는 영원한 진리를 추구한다.
2. 루이스는 인간의 공통 본성을 청중과의 접촉점으로 삼는다.
3. 루이스는 이성을 경험, 감정, 상상력의 맥락 안에서 본다.
4. 루이스는 사실 시인이고, 살아 있는 우주에서 은유와 의미의 기술을 사용한다.
5. 루이스의 책은 ‘순전한 기독교’를 다룬다.
6. 『순전한 기독교』는 값싼 은혜를 제시하지 않는다.
7. 『순전한 기독교』의 지속적인 매력은 복음 자체가 지닌 광휘에 근거한다.


그리고 “루이스는 청중이 기독교를 추상적 가르침들의 집합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실재를 비추어 주는 가장 아름다운 그 무엇으로 보고 경험하며 향유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라며 책을 마무리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생겨난 여러 의문이 있다. ‘이 책은 루이스를 다루는것인가 아니면 『순전한 기독교』가 주제인가? 아니면 복음주의를 이야기하고 싶은 것인가?’와 같은 것들이다. 우선 루이스에 대한 책이냐고 묻는다면 곧바로 그렇다고 답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하다. 그렇다면 이 책을 쓴 목적이 『순전한 기독교』라는 책 자체인지를 묻게 된다. 이 물음에 관해 저자는 “『순전한 기독교』에 대한 책이면서, 『순전한 기독교』에 감탄했던 사람들이 즐기고 배울 수 있게 쓰자.”라며 서론 부분에서 자신의 저술 원칙 두 가지를 밝히며 답한다.
저자의 첫 번째 저술 원칙은 서문에서 4장까지 읽다 보면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원칙은 어디에 있을까? 그 답은 5장, 7장, 8장에서 잘 드러난다. 이렇게 읽다 보면 ‘굳이 이 책을 왜 읽어야 하나?’라는 물음이 뒤따라온다. 왜냐하면 ‘더 많은 독자에게 다가서기보다는 일종에 팬덤에 기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는 무는 순간 “그래! 이 책은 ‘순전한 기독교’라 표현하고 싶은 복음주의 신학에 대한 변증서이다.”라는 생각에 다다르게 된다. 특히 5장(‘복음주의 영향권 안으로’)과 8장에서 『순전한 기독교』가 불후의 생명력을 갖게 된 일곱 이유 중 다섯 번째 이유를 찬찬히 살펴보면 이 책의 쓰임새는 복음주의 신학에 대한 안내서 또는 변증서라는 데 생각이 멈추게 된다. 저자 마즈던의 생각은 루이스의 글을 “모든 시대의 거의 모든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공통적으로 믿어온 바”로 요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 오늘날의 시대에 ‘순전한 기독교’를 이야기하는가
올바른 행동의 원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러면서도 지키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현실이라는 데서 인간의 절망을 인정하고 구원을 모색해야 하는가? 저자와 옮긴이가 주목한 것처럼 그것은 아마도 ‘순전한 기독교’ 곧 ‘Mere Christianity’일 것이다. 이 말에 대해 마즈던은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 루이스가 ‘mere’라는 단어를 본질적 또는 꾸미지 않은 중심과 관련됨을 말하는 옛 의미로 썼지만, 현대적 의미로 ‘한낱’이라고 독자들이 받아들인다고 해도 널리 공유된 기독교 가르침의 본질과 충돌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루이스가 ‘Mere Christianity’에서 지향하는 바는 어디에서 왔을까? 그것은 17세기 영국에서 교파 간의 갈등, 전쟁, 종교적 억압 시대를 살았던 신학자 리처드 백스터의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어떤 종교에도 속하지 않은 순전한 그리스도인이다. …순전한 그리스도인들이 순전한 그리스도교와 신조, 성경만을 따르고 사람들을 가르거나 싸움을 벌이는 분파에 속하지 않겠다고 말한다는 이유로 누군가 그들을 하나의 당파로 묶는다면, 나는 당파들에 철저히 반대하는 그 당파에 속한다.”(119쪽)라는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루이스의 글에서 읽을 수 있다.
또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의 머리말에서 나온 “대체 당신이 뭐라고, 누구는 그리스도인이고 누구는 아니라고 함부로 말하는 것인가?”, “이런 교리들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 가운데 교리들을 믿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참된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의 정신에 훨씬 더 가깝게 사는 그리스도인이 많지 않은가?” 등의 물음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에 대한 생각을 풀어놓는다.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은 ‘제자들’, 즉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에서 시작되었으니,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영에 가까운 사람인지를 말할 수 없으며,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 없고 또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또 기독교 교리를 받아들였지만 그에 합당치 않게 사는 사람이 있을 때,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라고 하기보다는 “그는 나쁜 그리스도인이다.”라고 하는 것이 더 분명한 표현이라고 말한다.
이어서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는 기존 교파들의 신조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방으로 통하는 문들이 있는 현관 마루에 더 가깝다고 이야기한다. 머리말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 집, 현관 마루, 그리고 방의 비유를 통해 순전한 기독교가 무엇이고,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리스도인이면서 갈등과 배척, 그리고 관조를 덕목으로 삼고 있는 이들에게 루이스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공통적으로 지켜야 할 규칙들, 이 교리들은 참된가? 여기에 거룩이 있는가? 나의 양심이 이쪽으로 움직이고 있는가? 이 문을 두드리길 꺼리는 것은 나의 교만이나 단순한 취향이거나 특정 문지기를 싫어하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묻는 것은 현관 마루에서 자신의 방으로 가기 위해 자신의 앞에 있는 문이 참된 문인지 스스로에게 묻는 것과 같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다른 방을 택한 사람, 여전히 현관 마루에서 서성거리는 사람이 있다면 친절하게 대하고 그들이 잘못하거나 혹은 그들이 원수라면 그들을 위해 더 기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이 그리스도인에게 공통적으로 부여된 규칙 가운데 하나라며 끝을 맺는다.
갈등과 반목, 그리고 싸움이 빈번해서 상처투성이인 우리에게 루이스는 옛 자아를 버리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내주하도록 모셔야 하며, 그것이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이를 달리 말하면 루이스는 여전히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또 다른 회심을 권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이 책을 처음 들었을 때로 돌아가 ‘도대체 왜 이 책을 읽어야 할까?’라고 묻는다면 이 물음에 어떤 답을 할 수 있을까? 모범 답안처럼 답하기를 바란다면 갈등 상황에서 또는 교만 때문에 타인에게 상처 주는 그리스도인에게 나쁜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고 “모든 시대의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공통적으로 믿어온 바”를 따르기 위해서라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신학적 분석을 통해서 복음주의 신학을 꿰뚫어 보기보다는 신앙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순전한 기독교』의 눈을 통해 다시 보기를 권하고 있다. 그래서 마즈던은 단순히 루이스의 생각이나 『순전한 기독교』의 내용을 분석하고 전하기보다는 마치 사람의 생애를 다루듯 『순전한 기독교』를 전기 형식으로 구성하고 펴낸 것 같다.
전기를 읽고 나서 마지막으로 드는 생각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 복음주의자로 산다는 건 무엇일까?”


오지석 | 숭실대학교 철학과에서 기독교윤리를 전공했다. 숭실대 한국기독교문화연구원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8년 11월호(통권 7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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