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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마당 (2018년 9월호)

 

  서양문명을 배경으로 한 인문학적 신 이해
  김용규의 『신: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문명 이야기』 IVP 2018

본문

 

재미있다. 신학책이 이렇게 재미있다면 모든 신학도가 정말 재미있게 공부할 것이다. 900쪽이나 되는 두꺼운 책을 읽는데 하나도 질리지 않고,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까지 지루하지 않았다.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였다.
왜 재미있을까? 첫째, 저자 김용규의 유려한 필체 때문이다. 막힘이 없고 억지가 없다. 물 흐르는 듯한 그의 필력은 상당한 내공이 묻어나는 고수의 면모를 보여준다. 둘째, 저자의 해박한 지식이 한몫 단단히 한다. 그는 신학, 철학, 문학, 예술, 자연과학 등이 어떻게 어우러져 서양문명을 이루어가는지 소상하게 밝혀준다. 그는 하나의 주제를 설명할 때 서양문명을 가지고 종횡으로 엮어서 재미있게 들려주며 독자들에게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셋째, 그의 글쓰기 방식이다. 가상의 대화 상대에게 질문과 답변을 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소위 ‘디아트리베’(diatribe) 방식으로 인해 원고의 부피를 늘여놓아 책이 두꺼워졌지만, 그 덕분에 책이 재밌어졌다.
하나 더. 사람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준다. 재일동포 목사님 중에 최창화라는 분이 계셨다. 인권운동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신 분이다. 이분이 일본 국영방송 NHK가 자기의 이름을 우리나라 말이 아닌 일본식 발음으로 부른 데 대하여 인격모독이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평소 자신의 이름을 일본식 발음으로 부르면 절대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사람들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었다. ‘칼뱅’의 이름을 ‘요한 칼빈’이라고 쓰면서 그 이유를 세세하게 설명하여 우리를 무안하게 만든다. 필자의 귀에 늘 거슬렸던 ‘어거스틴’도 ‘아우구스티누스’로 불러주어 속이 후련할 정도이다.
이 책의 제목은 ‘신’이다. 부제는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문명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 신학책이라기보다 인문학책이다. 신학 전공자인 필자에게 서평을 부탁할 게 아니라 인문학을 전공한 사람에게 부탁하는 게 옳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하기야 신학도 인문학이니까.) 「기독교사상」이 이 책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고, 필자도 당연히 ‘신’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번에 인문학이 신학보다 더 재미있다는 사실을 알아버렸으니 이를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
이 책은 5부 10장으로 되어 있다. 1부 “하나님은 누구인가”는 미켈란젤로 이야기로 시작된다. 왜 미켈란젤로가 하느님을 서양 늙은이로 그렸는지, 또 에로스의 의미와 함께 신인동형론(Anthropomorphism)의 뜻도 제기된다. 하느님을 인간처럼 묘사하는 것을 신인동형론이라 하고, 인간을 신처럼 묘사하는 것은 인신동형론(Theomorphism)이라 한다. 그리스 신화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에로스의 속뜻은 사랑(궁극적 관심)의 대상에게로의 셀프-엘리베이션(Self-Elevation)이다. 그렇게 합일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풀이한 것은 좀 낙후된 해석이 아닐까? ‘형상’이란 ‘모습’이다. ‘초상’이다. 왜 하느님이 자기의 초상을 이 땅 위에 두루 세워놓았을까? 그것은 자기의 지배를 알리는 방식이다. 사람을 보면 하느님이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느님의 통치방식이 아닌, 독재나 빈부격차는 하느님에 대한 반역이다.
1장 “존재란 무엇인가”에서는 존재의 의미를 다룬다. 존재와 존재물은 구분된다. 하느님은 존재물이 아닌 ‘존재 자체’이다. 그런데 존재의 사다리나 계층 구조는 사회적 계층 구조를 낳는다. 여기서 사회적 신분제도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하느님의 형상을 얼마나 받는지에 따라 현실 세계에서 신분이 결정되는 것인가? 플라톤의 ‘분여설’(分與說)이나 플로티노스의 ‘유출설’(流出說)도 마찬가지이다. 이데아를 많이 받고 적게 받음이 사람의 차이를 결정하지 않는다. 플라톤은 세 가지 자랑거리가 있다고 말했다. 첫째는 그리스 사람인 것이 자랑이고, 둘째는 남자인 것이 자랑이고, 셋째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것이 자랑이라고 했다. 벌써 그의 마음속에는 그리스인이 아닌 사람들에 대한 멸시가 있고, 여자에 대한 경멸이 있다. 천주교의 계급구조(Hierarchy)도 여기서 연유한 것이다. 이런 것이 사회의 신분계급을 조장하고 차별을 만든다.
2장 “하나님은 실제로 존재하는가”에서는 신 존재 증명을 시도한다. 안셀무스는 “최고관념인 신은 최고의 관념이기에 실제로도 존재하여야 한다.”라고 했다. 이에 대해 가우닐로는 “가장 완벽한 섬을 인간이 상상한다고 해서 실제로 그 섬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반박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다섯 가지 길을 제시했다. 모든 운동의 궁극적 근거로서 제일운동자, 모든 결과의 궁극적 원인으로서 제일능동인, 모든 우연의 궁극적 근거로서 필연적 존재, 최고 단계의 가치로서 하느님, 모든 사물의 궁극적 설계자와 통치자로서 하느님을 주장하였다. 이 주장은 흄과 칸트에 의해서 반박되었다. 이는 경험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인간 이성의 한계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 쪽에서는 끊임없이 칸트를 비난하면서 존재의 사다리를 옹호하였다. 그래야 그들의 계급구조를 유지하니까.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장은 존재를 서열화하여 맨 마지막에 하느님이 있다는 논리이다.
3장 “창조론이 왜 『고백록』 안에 있나”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 어릴 때부터 그리스도인이 된 다음, 그리고 위대한 학문을 이루기까지 그의 학문적 배경을 알려준다. 라틴어로 된 그의 책 confessiones는 ‘고백’(confession)이라는 뜻이 있지만 ‘증언’(testimony)이라는 뜻도 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책을 쓸 때는 후자의 뜻으로 썼다는 것이다.
4장 “창조는 어떻게 이루어졌나”에서 저자는 자연과학 지식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빅뱅이론, 우주 인플레이션이론, 다중우주이론, 초끈이론, 양자물리학(입자-파동설) 따위를 총동원하여 창조를 신학이 아닌 자연과학적으로 설득하려고 한다. 그리고 시간과 영원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그뿐만 아니라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놀이를 비유로 들어 자연과학과 신학의 소통에 애를 쓴다. 그냥 신학과 자연과학은 그 토대가 다르다고 인정하면 될 것을 굳이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놀이를 언급하며 서로 소통하게 하려 애를 쓴다.
5장 “창조의 목적은 무엇인가”에서는 진화론에 대하여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창조의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끄트머리에 창조의 목적이 구원이라는 말이 나온다. 저자가 수없이 되뇌는 자연과학의 이론을 들으면서 참 딱하다는 생각이 든다. 신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훨씬 간명하다. 그리스도교와 진화론을 설명할 때도 서로 다른 토대 위에 세워진 학문임을 말하면 될 것을, 굳이 진화론의 역사와 그리스도교와의 논쟁까지 들먹일 필요가 있을까?
다만 문제는 사회진화론이다. 인간의 진화는 신체적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 사회도 진화한다는 가설이다. 진화된 사회에서 사는 사람은 이른바 문명인이고, 그 반대는 야만인이다. 하지만 인간이 인간을 노예로 삼고 처참하게 학살하는 것이 문명이란 말인가.
6장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관계가 있나”에서 저자는 많은 이야기로 헬레니즘(아테네)과 헤브라이즘(예루살렘)의 관계를 인문학적으로 설명하였는데, 신학적으로는 간단하다. 그것은 야웨 종교의 그리스-로마 세계에 대한 토착화이다. 신약성서 자체가 예수의 복음을 그리스-로마 세계에 토착화한 산물이다.
7장 “하나님의 인격성이란 무엇인가”에서는 섭리에 대한 이야기, 은총과 자유의지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 둘은 서로 모순되는가? 인간의 구원이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필요가 없으며, 인간의 자유의지가 인간 구원에 젖어들게 되면 하느님의 은총은 설 자리를 잃는다. 이 딜레마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
8장 “하나님의 인격성과 하나님의 부재”에서는 신의론(神義論)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실재하는 악을 ‘선의 부재’로만 설명할 수 있는가? 여기서 인간의 고난 문제가 발생한다. 고난 문제의 참된 해결은 인간이 고난 자체를 사는 것이 아닐까? 결국 신의론은 인의론(人義論) 문제가 된다.
9장 “일자란 무엇인가”에서는 삼위일체를 다룬다. 그러나 모든 삼위일체 이론은 완벽한 것이 없다. 결국에는 그 의미를 다루는 수밖에 없다. 상호내주적, 상호침투적 공동체로서의 의미이다.
10장 “유일신은 배타적인가”에서 저자는 유일신 종교에 대한 배타성을 질책하고 있다. 일자(一者)란 모든 것을 배제함을 뜻하지 않는다. 일자란 모든 것을 다 포함하는 것이다. 따라서 유일신은 배타적인 신이 아니라, 모든 이들을 품어주는 신이다.
하느님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위해서는 반드시 “신”에 대한 사회적・역사적 해석이 필요하다. 창조이야기(P 자료)는 이스라엘이 바빌로니아 포로에서 귀환한 이후에 나온 작품이다. 바빌로니아 신화에서는 인간이 노예로 창조되었다. 이스라엘은 포로지에서 돌아온 후 바빌로니아의 신들보다 월등히 뛰어난 신이 인간을 모든 피조물 중에 최고로 귀한 존재로 창조하였다고 기록하였다. 포로 귀환 후의 폐허 속에서 그들의 삶을 이어나가고, 자존감을 세워줄 활력소가 필요했던 것이다.
‘무로부터의 창조’에도 반론이 있다. 보스턴학파에 따르면, 성서의 창조 이야기에는 하느님이 ‘아무것’도 ’없는’ 데서 창조하셨다기보다 ‘어두움’이 ‘있는’ 데서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의 완전성에 흠결이 생긴 것이다.
저자는 정통신학만 찾는데, 정통신학이란 도대체 어떤 신학인가? 2,000년의 역사를 가진 그리스도교에는 참으로 다양한 신학이 존재한다. 가령 진화론을 이야기할 때 과정신학을 언급했더라면 보다 더 이야기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특히 떼이야르 드 샤르댕의 신학은 진화론을 신학에 그대로 옮겨놓았다고 할 만하다.
저자 김용규의 유려한 필체와 해박한 지식으로 재미있게 써내려간 『신』은 이 책의 부제가 말하듯 서양문명을 배경으로 한 신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위한 것이다. 그러면 동양문명에서 이해한 제일 큰 개념, 신만큼 큰 개념은 어떤 것일까? 서양에서 발견한 제일 큰 개념이 ‘신’(神)이라면 동양에서 발견한 가장 큰 개념은 ‘도’(道)라고 볼 수 있다. 이제 동양문명을 배경으로 한 도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위한 책도 기대해 본다.

조수현 | 목원대학교에서 조직신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잘못을 저질러 왔는가』가 있다. 감리교 빈들공동체의 원로목사이다.

 
 
 

2018년 11월호(통권 7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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