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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마당 (2018년 6월호)

 

  종교 부재의 시대에 일어난 신의 귀환
  테리 이글턴의 『신의 죽음 그리고 문화』 알마출판사

본문

 

21세기를 떠들썩하게 맞이하며 “‘문화의 세기’가 온다!”라고 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러나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은 이것이 ‘오래된 구호’라는 점을 분명히 알려준다. 문화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연구 방법도 달라지고 접근 방식도 달라진다. 이글턴은 이 다양한 접근 방식을 ‘종교의 부재’ 혹은 ‘신의 죽음’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다시 해부한다. 이미 초기부터 근대의 문은 교회의 문과 붙어 있었다. 한쪽이 열리면 한쪽은 닫혀야 했던 것으로 이해된 것이다.
이글턴은 전형적인 영국식 학자 특유의 맛을 낼 줄 안다. 마르크스주의에 정통하면서도 영국에서 태동한 ‘문화연구’의 한계를 정확히 짚어낸다. 대중문화, 고급예술, 문학, 신학, 인문학의 풍부한 사례들을 자유롭게 구사하면서도, 결코 논의의 집중력을 잃지 않는다. 서구 문화의 전문가라 하더라도, 이글턴의 논의를 따라가기가 쉽지 않은 이유는 그의 사상적 유연함이 그동안 상식으로 정형화되어 있던 전제들의 토대를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이글턴이 던진 가장 결정적인 논지는, 근대의 문을 열었던 수많은 세속주의자들이 끊임없이 기획한 ‘신의 죽음’은 결국 실패했다는 것이다. 중세를 넘어서기 위해 필수적이라 여겨지던 그 기획은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서 절실한 것이었지만, 그 열망의 크기만큼 ‘신의 부재’가 남기는 공허함을 확인해야 할 운명이었다는 것이다. 그 열망의 실체는 실상 스스로 부재를 선택하는 신에 대한 오해라고 본다.
이글턴이 이 책을 쓴 의도는 새롭게 제기되는 종교의 정치적 역할의 기원을 살피고 그 필요성을 변호하기 위해서이다. 신의 부재를 열망하며 달려온 자본주의 사회와 신의 명령으로 전쟁을 선포하는 ‘원리주의’ 사회의 충돌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탈종교적 태도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글턴은 이러한 주장을 펼치기 위해, 애초에 계몽주의가 기획했던 탈종교화의 한계를 짚으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계몽주의에서 낭만주의까지
이글턴은 계몽주의의 한계를 말한다. 인간의 주체성은 신의 다른 이름이었다. 주체성을 찾아 헤맨다면, 교회의 문을 빠져나올 수 있었는지는 몰라도 종교의 유익함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상류층이었던 계몽주의자들은 신을 부정하려 했지만, 민중들에게는 종교적 질서를 유지하여 계몽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이중성을 보였다. 이글턴은 이 한계를 일러, “인간을 없애지 않는 한 결코 신을 없앨 수는 없다.”라고 정리했다.
더구나 이글턴은 이성의 합리적 판단은 사람들에게 희열이나 위로, 공동체 의식을 심어줄 수 없었기에 관념론과 낭만주의가 등장하게 되었다고 분석한다. 그가 보기에 이러한 시도는 자본주의의 메마른 정서를 적시기 위해 과거의 형식을 호출해오는 것이었다. 비록 종교 고유의 상징적 원천을 고갈시키는 위험을 감수하겠지만, 종교는 일상적인 문화적 형식으로 다시 재현되고야 마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전문가인 이글턴은 관념주의자를 다루면서, 마르크스주의의 형식은 종교와 무관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비전은 종교적 사상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본다. 그는 “마르크스주의는 종교 때문에 난처해하기보다는 종교로 인해 더욱 풍부해졌다고 봐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 마르크스주의자와 종교는 적대적이지 않다. 이글턴은 종교적 관념이 마르크스주의를 통해 여전히 건재함을 말하고 싶어 한다.
감정, 느낌, 경험 등의 이름으로 재현된(혹은 세속화된) 종교는 증명될 수도 없고 증명이 필요하지도 않다. 또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재생된 인간의 감각은 언제나 존재하며 더 먼저 존재해야 하는 선험의 어떤 것이다. 이것은 종교를 떠난 인간에게 다시 토대를 묻는 질문으로 제기된다. 즉 “세속적 사회질서는 도덕적 근거에 문제가 있다.”라는 식이다. 이 질문은 근대주의의 토대 자체를 의심하는 시대가 도래하면서 다시 한 번 그 한계에 직면한다.

문화, 니체를 통해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이글턴은 “문화가 종교를 대신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후보였다면 그것은 문화가 토대적 가치, 초월적 진리, 권위적 전통, 도덕적 성장, 공동의 정체성 그리고 사회적 임무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고 보았다. 그러나 ‘삶의 모든 형태/양식’으로서 문화라는 보편적이고 중립적인 개념은 인간 사회의 다원적 층위를 반영하는 하위적 문화개념으로 전환되면서 여지없이 타격을 입었다. 매튜 아놀드(Matthew Arnold)와 같이 교양과 문화를 동일시하던 초기의 입장은 소수자의 문화적 욕망 기제를 투쟁적으로 반영하는 ‘문화연구’의 공격에 무기력했다.
문화가 종교의 대체자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세속의 권위에 도덕적 역할을 맡겨야 한다는 것이 인도종교나 콩트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예술이나 문학이 문화적 언어로 종교를 표현하면서 종교를 재구성하는 일에 기여했지만, 이글턴의 관점에서는 그 역시 지나친 회의주의로 인해 새로운 대안적 종교를 구성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이는 과학주의가 종교의 자리를 대체할 것이라는 잘못된 예측과도 같이, 다른 범주에 속한 종교의 역할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최초의 무신론자라 자칭하는 니체는 신의 자리가 더 이상 다른 무엇으로 채워질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그는 “신이라는 존재에 내재한 의미까지 없앨 수 있을 때 진정 신을 제거할 수 있다고 인식한다.” 신의 부재로부터 오는 고통과 아픔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 공허함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다. 이성이나 도덕과 같은 가짜 종교로부터 스스로 해방된 이가 진정한 무신론자이다.
이제 포스트모더니즘은 문화를 정치의 대안으로 삼았던 과거의 유산을 지우고 아예 문화와 정치를 융합해버린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구원은 예술에서 미학으로 다가온다. 종교적 초월로 고양되지 않는 미학은 일상화되고 상품화되면서 종교의 대체물로서의 역할을 중지하고자 한다. 대중에 영합한 포스트모더니즘은 내재적 의미의 부재를 받아들이고 심지어 지지한다. 보편적 진리도, 가짜 의식도 없으므로 근대가 구축한 토대 자체가 사라진다.
이제 신의 부재를 슬퍼할 필요가 없다. 처음부터 부재될 신 자체가 없다. 신이 기생할 자리란 없다. 니체를 계승한 “포스트모더니즘은 니체의 초인 개념을 버리고 구세대적 신성을 대체하기 위해 새로운 형태의 신성을 밀반입하는 것도 반대한다.” 그래서 인간이 가진 주체성의 근거를 의심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무신론이 가능하다. 신에 대한 어떠한 충성도 요구되지 않는 바의 가짜 영성들이 그러하다.
이토록 암울한 전망을 쏟아낸 이글턴은 소비 자본주의가 지속되는 한 국가나 사회에 종교적 신념이나 도덕이 여전히 요청될 것이라는 점을 급작스럽게 강조한다. 9・11 이후 서구 사회에서 전개된 고압적 정치활동은 이슬람의 저항을 촉발했는데, 이는 역사의 종언, 신의 부재라는 국면에서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무신론에 입각해 돌진하던 자본주의 사회에 종교는 다시 귀환했다.
이글턴은 서구 사회가 무신론적 자본주의에 도취되어 있을 때 오히려 신을 향한 충성심으로 무장한 이슬람 ‘원리주의’를 만나게 된 것을 두고, “분노에 찬 신이 자신의 부고 공지를 너무 빨리 올렸다고 항의하기 위해 다시 한 번 고개를 들었다.”라고 표현했다. 이로써 근대부터 기획된 신의 죽음은 실패했다. 그 이유는 순전히 정치적 이유에서라고 이글턴은 보았다. 지금은 종교가 일상 속으로 들어오는 때이다.
이런 점에서 이글턴의 결말은 매우 흥미롭다. 우리가 과거처럼 종교를 의지할 수 없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 자신의 근원을 어떤 개념이 아니라 “그 자신 너머에 놓은 무엇인가에 뿌리를 둘 때 진정 합리적”이라고 주장한다. 오늘날 많은 사상가들이 인간에게 중요한 여러 가치의 종교적 기원에 대해 부정하지 않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세속적 삶에도 종교가 유익하다고 주장하는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처럼 종교가 도덕적 선의와 공동체적 가치를 제공한다고 인정하는 견해가 주목받고 있다.

이글턴은 “종교적 믿음이 사회질서의 실존을 위한 일련의 근거를 제공하는 부담에서 자유로워진다면, 종교적 믿음은 정치의 비판자로서 진정한 목적을 자유롭게 재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특히 기독교의 본령은 오히려 근대가 열망했던 ‘신의 부재’에 있다는 사실을 역설한다. 소멸을 통해 새로워지며, 힘없는 자들과의 연대를 통해 힘을 얻는 것이 기독교의 영성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십자가를 오해한 것이 아닌가.
“예수는 신이 미약하고 무가치한 인간이라는 존재로 온 성육신임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오늘날 다시 호출되는 기독교가 제시할 새로운 인간과 문화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인간의 주체성과 대결하지 않고 돈과 권력을 상징하지도 않는, 그래서 모든 우상을 파괴하고 스스로 십자가에 달리는 나약한 신의 형상으로 재현되는 모습이어야 한다. 신의 죽음은 인간의 기획이 아니라 신의 선택이었다. 고로 신은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시다.

성석환 | 기독교윤리학을 전공하였다. 최근 저서로 『지역공동체와 함께 하는 교회의 새로운 도전들』이 있다. 장로회신학대학교 조교수로 재직 중이며, 기독교와 문화를 가르치고 있다.

 
 
 

2018년 7월호(통권 7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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