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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마당 (2018년 6월호)

 

  야수의 송곳니를 뽑기 위하여 –존 하워드 요더의 성폭력 사건
  존 D. 로스의 『야수의 송곳니를 뽑다』 대장간

본문

 

지난 몇 달 동안 우리 사회의 변화는 미투운동이 이끌어왔다. 미투운동이란 권력을 남용하여 상대를 성적으로 대상화하고 신체의 자유를 침해한 범죄행위의 폭로에 동참하는 것을 뜻한다. 권력의 정점인 법조계로부터 교육, 문화, 예술계에 이르기까지 피해자들은 깊은 침묵을 깨고 뿌리 깊은 상처와 분노를 드러냈다. 성폭력 피해자가 대부분 여성이라는 사실은 이 사회가 얼마나 성차별적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성폭력과 성차별은 깊이 연동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간 당연하게 여겼던 언행이 이제는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된 것에 당황한 이들 중에는 음모론, 대의론, 사이비론 등을 내세워 미투운동의 바람을 잠재우려고 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럴 줄 알았다.’에서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라며 이토록 성적 폭력과 학대가 사회 구석구석에 퍼져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미투운동의 강풍은 종교계에서도 강하게 몰아치고 있다. 특히 교회 안팎에서 성폭력을 당한 여성들의 폭로가 잇따르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기독교 윤리학자 존 하워드 요더(1927-97)의 성폭력1 사건을 다룬 책이 나온 것은 매우 시의적절하다. 이 책은 세계적 신학자였던 요더가 1970년대 중반부터 자신이 속한 학교 및 교단의 학생, 교직원, 교우를 대상으로 ‘성에 대한 실험’이라는 미명으로 자행한 권력형 성폭력 사건과 이에 대한 조직의 대응을 다루고 있다. 당시 요더의 비행을 인지한 학교에서는 비밀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교단에서도 다수의 대책위를 구성하여 진상파악과 해결을 위한 노력을 했으나 요더의 성범죄를 중단시키지 못했다.
요더로부터 성폭력을 당한 여성은 100여 명에 이른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첫째, 메노나이트 관련 학교와 교단에서 조직한 대책위의 구성원들이 가해자 요더의 동료들이었고, 젠더의식이 없는 그들이 문제해결의 방향을 잘못 잡았기 때문이다. 성적 학대가 알려졌고 피해자의 존재도 알고 있으면서 그들은 피해자에 대한 그 어떤 배려나 치유 프로그램도 제공하지 않았다. 사건 발생 몇 년 뒤 피해자의 의견을 듣기 위한 장이 마련되었지만, 그 자리에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대책위가 피해자의 치유보다는 가해자의 가정과 교회, 학교의 명예를 지키는 데 주력하는 바람에 피해자들이 더 깊은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고백을 할 수 있을 만큼 대책위는 안전하지도 않았고 믿을 수도 없었던 것이다.
둘째, 피해자의 고통과 상처를 듣고자 하는 귀가 없었기 때문이다. ‘존 하워드 요더에 관한 마를린 밀러 파일’이 보여주듯이 거기에는 피해자의 목소리가 없다. 대신 지면을 가득 메운 것은 권력과 자원을 가진 가해자 요더의 항변뿐이다. 1980년대 초 비밀대책위에서 요더는 자신의 행위를 음행이나 범죄가 아닌 ‘성적 실험’이며 치유과정이라고 명명했다. 자신은 “예수가 여성들을 대했던 방식대로” 성욕이 수반되지 않는 신체접촉으로 기독교인이 새로운 가족윤리의 비전을 실천했을 뿐이며 “사정하지 않은 성교 삽입은 성교가 아니라” 교중 자매들과 나눈 가족적 혹은 친밀한 활동이자 허용할 만한 행동이라고 강변했다. 오히려 대안적 공리를 실험하는 자신의 창조적 행위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는 공동체의 “평범성”과 씨름하는 자신이 “희생자”라고 항변하였다.
세계적 신학자라는 명성과 “전설적인 현란한 말솜씨”와 그의 지적 권위에 휘둘린 대책위는 그의 행위가 권력형 성폭력임을 인식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요더의 말년에 과거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라는 대책위의 요청에 대해서도, 그는 “내가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지 않아도 될 일을 끊임없이 잘못 인식해온 기관의 결정들에 대해 유감”이라는 성명서를 제출할 정도였다.
요더는 대책위가 제시한 금지조항에 따르지 않을 정도로 스스로 입법자가 되었으며, 피해 여성들에게 자신의 실험을 이해하지 못하였다며 유감을 표명하고 “특정한 사람들과 맺고 있는 관계들을 성추행으로 해석하는 여성운동가들”이라며 페미니즘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역공격에 활용했다. 1960년대 미국 사회에서는 성추행에 관한 법 규정이 있었고, 1980년대에는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성추행이 범죄임을 연방법에서 규정하고 있었는데도 급진적 사상가라는 명성이 무색하게 요더는 젠더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지체된 사유를 하고 있었다.

가부장 사회에서 성장한 진보 지식인 중에는 젠더문제에 대해서는 진보적이기는커녕 구시대적으로 사유하고 행동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성평등에 대한 감수성이 낮았던 요더 역시 세계적인 급진적 학자라는 상징자본과 지적 자원을 활용해 피해자의 고통을 외면하고 자신의 범죄적 행위를 정당화한 것이다.
셋째, 그의 만행을 성폭력이 아닌 나쁜 성벽이나 성중독증, 아스퍼거증후군, 귀신에 사로잡힘 등으로 해석하면서 마치 타고난 본능이나 질병 탓으로 돌렸기 때문이다. 만약 성범죄의 원인을 예외적 일탈자의 성향이나 피해자 탓으로 돌린다면, 남성중심 사회가 양산하는 성폭력의 구조적 죄악을 은폐하기 십상이다.
페니스파시즘으로 구조화된 사회에서 남자아이로 태어나 청소년기를 거쳐 남자 어른이 되는 과정은 무고한 한 아이를 성범죄자로 만들기 쉽다. 한국 사회의 남자 만들기 과정을 생각해보자. 성장하는 동안에 얼마나 빈번하게 여성을 성적으로 비하하는 욕설을 듣고,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미디어에 얼마나 많이 노출될 수밖에 없는지. 무심코 들었던 여성혐오의 말이 한 소년의 무의식에 깊이 각인되고 훗날 부지불식간에 그의 언행으로 표출될 것이다. 사소하게 여겼던 농담이 쌓이고 쌓여 엄청난 죄악으로 이어질 수 있다. 몇 년 전 단톡방에서 발생한 대학생들의 성희롱 사건 보도를 접한 후, 페미니즘 수업을 수강하게 되었다고 말한 한 남학생이 필자의 수업에 참여한 적이 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해자가 될까 두려웠다고 고백하던 그 학생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페미니즘 교육이 초중고 교과과정에, 또 교회 공과시간에 필수적이어야 하는 이유이다.
성폭력 범죄 발생을 차단한다는 명목으로 남성 사회에서는 최근 ‘펜스 룰’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아내 외의 여성과 절대로 단둘이 식사를 하지 않는다.”라는 미국 부통령 펜스가 취한 방식을 통해 여성과의 개별적·비공식적 교류를 차단함으로써 성폭력을 방지하자는 것이다. 이는 대안이기는커녕 성평등 정책에 역행하는 일이다. 성에 따른 차별 없이 모두가 인격적으로 존중받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대신 여성의 사회진출과 지위향상을 막음으로써 권력과 자원을 독점하려는 발상이기 때문이다.
구조적 차원에서 반복되는 성범죄를 없애려면 사건이 발생했을 때 조직 내 비공식적 분쟁해결기구를 마련하여 당사자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절차를 제공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요더 사건의 대책위는 첫 출발부터 문제를 안고 있었던 것이다. 가해자는 죗값에 따라 처벌하며, 2차 가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제3자 구성원들의 자율적 대응력을 향상시키는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범죄가 발생하면 피해자는 보호받아야 하고 가해자는 벌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안다. 이 당연한 원칙이 권력형 성폭력 사건에서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피해자들은 폭력을 당하고도 사건과 상관없는 옷차림이나 성격, 외모, 업무능력이나 사생활이 들추어지고, 반대로 가해자에 대해서는 “앞날이 창창한 사람이다, 아까운 사람이다, 그동안 쌓은 명성은 물론이고 목숨이 걸린 문제다.”와 같은 발언이 나오곤 하는데 이는 명백한 2차 가해이다. 노골적 혹은 은밀한 방식으로 피해자를 왕따시키는 문화 역시 피해사실의 폭로를 주저하게 만든다.
권력을 독점하는 남성 사회는 구조적 죄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오랫동안 요더가 안전하게 살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권력의 힘이었다. 교회나 사회, 학교 등의 조직에서 성범죄가 청산되려면 권력을 나누어야 한다. 조직의 민주화가 급선무라는 말이다. 사실 미투운동은 개인의 폭로와 저항으로 엄청난 효과를 얻었지만 동시에 한계도 분명하다. 제도적으로 대안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개인이 짊어져야 할 짐은 너무 무겁다. 이제 한국교회도 피해를 폭로하려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의 목소리에 권위를 주며, 남성이 독점하고 있는 제도의 개혁으로 나아가야 한다. 아직은 ‘야수의 힘’이 너무 강한 한국교회에서 이 책은 변화의 지렛대가 될 것이다.

1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성에 관련된 범죄 용어를 세밀하게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다. ‘성추행’은 폭행이나 협박을 통해 이루어진 추행을 의미하며, 법적 용어로는 ‘강제추행’이다. ‘성폭행’은 폭행 또는 협박을 수단으로 강간하거나 강간을 시도한 행위로서, 법적 용어로는 ‘강간’이나 ‘강간미수’에 해당된다. ‘성폭력’은 성추행, 성폭행, 성희롱 등 성에 관련된 범죄를 모두 아우르는 개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요더의 경우는 ‘성폭력’이 적절한 표현이나, 번역된 책에서는 원어 ‘sexual harassment’의 뜻을 살려 ‘성추행’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 글에서 요더의 행위는 인용구절을 제외하고 ‘성폭력’으로 지칭한다.

이숙진 | 이화여자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성공회대학교 연구교수와 서울대학교 박사후연구원을 지냈다. 저서로 『한국 기독교와 여성 정체성』, 『종교는 돈을 어떻게 가르치는가』(공저), 『미디어와 여성신학』(공저) 등이 있다.

 
 
 

2018년 7월호(통권 7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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