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 대한기독교서회 | 회원가입 | 로그인
사이트 내 전체검색

Home > 기독교사상 > 교회와현장 > 국제와이즈멘 여수세계대회 기조연설
교회와현장 (2018년 10월호)

 

  나의 변화가 세상을 바꾼다
  -무아, 십자가, 인(仁)과 빔(虛)의 새로운 해석

본문

 

* 이 글은 제73차 국제와이즈멘 여수세계대회(2018. 8. 9-12)에서 발표된 동양학자 김용옥 선생의 기조연설문이다. 1920년에 창설된 와이즈멘(Y’s Men)은 사회봉사 활동을 통하여 보다 나은 세계 건설을 위하여 활동하는 국제봉사단체이다. 이번 대회는 “Yes, We can change!”(변화로 새로워지다)라는 주제로 73개국 3,000여 명이 참가하였다. - 편집자 주

국제와이즈멘 제73차 여수세계대회라는, 인류 보편사의 획을 그을 만한 이 찬연(燦然)한 자리에서 뜻깊은 기조연설을 행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단순한 섭리의 우연만은 아닐 것 같습니다. 저는 오직 감사한 마음으로 여러분들과 함께 조심스럽게 이 연단에 올라왔습니다. 우선 여수의 사업가 문상봉 선생님께서 전 세계의 와이즈멘을 총괄하는 국제와이즈멘 총재로 취임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것은 문상봉 선생님 개인의 영예일 뿐 아니라, 한국인의 기상과 한국 문명의 가치를 드높이는 위대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제 인생에서 ‘와이즈멘’이라 하면 떠오르는 그리운 얼굴이 있습니다. 1970년대 박정희 군사독재의 엄혹한 시절에 저는 일본에 유학을 하였습니다. 그때는 외국인 특수입학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 학생들과 똑같이 경쟁의 과정을 거치고, 시험을 치러야 했습니다. 저는 동경대학(東京大學) 중국철학과(中國哲學科) 대학원에 당당히 입학하여 2년 만에 명말청초(明末淸初)의 대유(大儒) 왕부지(王夫之)에 관한 석사논문을 완성하였습니다. 참으로 지난하기 그지없는 고통의 세월이었고, 배움의 세월이었고, 희망의 세월이었고, 보람의 세월이었습니다.
이 모든 고통을 감내하며 그 지난한 세월을 버틸 수 있도록 도와주신 한 분이 계셨습니다. 일본 와이즈멘의 주요 멤버 중 한 분이셨습니다. 저의 일본 체재의 보증인이 되어주셨고 저의 유학생활 모든 것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습니다. 당시는 보증인이 없이는 체류가 불가능했습니다. 여기 일본에서 오신 분은 와이즈멘의 ‘나라 신’(奈良信)이라는 건축가를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일본의 교회 건물을 많이 지으신 분이죠. 제가 불민하여 계속 연락을 못드렸습니다만, 제 나이도 벌써 70이 넘었으니 아직 생존해 계실지 어떨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나라 신 선생님과의 교유를 통해 일본의 크리스천들이 얼마나 고귀한 신념의 소유자들인가, 함석헌 선생의 스승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 Uchimura Kanzo, 1861-1930), 동경대학 총장을 역임한 난바라 시게루(南原繁, Nanbara Shigeru, 1889-1974)와 같은 이들의 영향을 받은 수없는 사상가들에 관해 깊은 통찰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일본 문명에는 보편주의적 사고가 좀 부족한 편입니다. 그러나 일본의 크리스천들은 인류 보편의 가치에 대한 치열한 신념을 대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20세기는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4차에 걸친 중동전쟁,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등 인류사상 가장 대규모의 전쟁이 발발한, 전쟁에 광분한 세기처럼 보입니다. 20세기는 전 세계가 민족국가들(nation-states)로 분할되었고, 애국주의가 팽배했으며, 과학의 발달로 통신과 무기의 비약적 진보가 달성되어 전쟁의 방식이 이전과는 비교될 수가 없는 대규모의 스케일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전쟁으로 누벼진 한 세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 전쟁이라는 수단에 호소하는 국가 간, 인종 간, 신념 간의 대결 양상은 그 이전의 인류 역사에 훨씬 더 참혹했습니다. 19세기의 예를 들어볼까요? 나폴레옹전쟁, 프로이센·오스트리아전쟁, 보불전쟁, 미국의 남북전쟁, 중국의 아편전쟁, 조선의 열강침공, 제국주의 열강의 발호 등 수없는 사례를 열거할 수 있습니다. 18세기는 더 심각하지요.
인류 근대사의 전체적 흐름을 통관(通觀)해보면 오히려 20세기는 세력의 균형 속에서 전쟁이 억제되어간 세기라고도 역설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의 결말은 전쟁이라는 수단이 얼마나 무의미한 광란인가 하는 것을 인류에게 절실하게 인식시켰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은 1차 대전의 잘못 처리된 업보들이 확대되어, 또다시 광란의 날개를 편 불행한 후폭풍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덕분에 세계는 인류사에 전무후무한 냉전질서를 얻었으며, 그 업보의 관성은 아직도 한국의 분단 상황을 지배하고 있고, 트럼프 나토 전략의 핵심적 과제 상황의 아이러니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미소 냉전질서라는 매우 유니크한 세계 질서가 형성되게 된 그 핵심에 바로 6·25전쟁(한국전쟁)이라는 불행한 사건이 있습니다. 비극적인 맥락이기는 하지만 한국 역사가 세계사의 추뉴(樞紐)가 된 사건이지요. 이 사건은 일차적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강점으로 그 원인을 규정해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조선 강점 36년 동안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지사들 사이에서 좌익과 우익의 분열이 극심했고,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일본 제국주의가 갑자기 물러나자 그 힘의 공백을 차지하려는 열강들의 싸움이 좌우 분열을 더욱 타협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해방 혼돈 정국에서 정권을 장악했던 남쪽의 이승만과 북쪽의 김일성은 민족단합의 대의(大義)를 위하여 자신의 정권욕을 버리고 협상이나 화합의 계기를 창출할 수 있는 그런 인품의 소유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1948년 4월에 김일성, 김두봉, 김구, 김규식의 4김회담(남북협상)과 같은 건설적인 시도도 있었지만, 그러한 정치적 협상의 길은 묵살되고 ‘무력에 의한 조국통일’이라는 어리석은 길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자기가 살고 있는 ‘코스모스’를 무력으로 통일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 코스모스는 오직 카오스로 변할 뿐이지요.
인류 역사의 과거에는 전쟁의 개념이 20세기와 달랐습니다. 우선 전쟁터가 사람들의 삶의 공간이 아닌 곳에서 이루어졌고, 전쟁의 당사자들도 기사 계급이나 직업군인, 용병, 또는 특수하게 징발된 사람들이었지, 20세기 국민국가에서 나타난 국민개병제도의 대규모 군대가 아니었습니다. 전쟁 그것이 곧바로 우리의 삶의 터전을 붕괴시키는데 전쟁에서 우리가 과연 무엇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6·25의 참상은 신석기 시대로부터 지속되어 내려온 전쟁이라고 하는 인간세의 우매함의 모든 가치가 집중된 자기파멸의 우거(愚擧)일 뿐이었습니다.
이 전쟁은 조선 민중 300만 이상을 살상하였으며, 유엔군, 미군, 중공군의 상당수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미군의 사상자 숫자만 해도 월남전에 육박하는 대규모 전쟁이었습니다. 이 끔찍한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조차도 우리 조선 민중은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전쟁의 결과로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전쟁 전에도 분단국가였고, 전쟁 후에도 분단국가였습니다. 분단은 자기분열일 뿐만 아니라, 타자에 의하여 악용될 수 있는 모든 불리한 조건을 떠안는 자기파멸의 길일 뿐입니다. 이러한 최악의 파국 속에서 대한민국의 민중은 민주의 열망을 성취해가는 기적 같은 역사의 진로를 더듬어 나갔습니다.
예수의 공생애의 출발은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직후에 갈릴리에서 천국을 선포하는 행위를 기점으로 삼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막 1:15) 여기 ‘때’라는 것은 ‘카이로스’(kairos)인데 ‘크로노스’(chronos)와 대비되는 말이며, 요즈음 말로는 ‘결정적인 타이밍’, ‘절호의 기회’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테오스(theos)의 바실레이아(basileia)’라는 것인데, 바실레이아는 기실 나라, 국가, 체제가 아니라 ‘새로운 질서’, ‘지배’를 의미하는 추상적인 말입니다. ‘회개’라는 말은 ‘메타노이아’(metanoia)인데 죄를 뉘우친다는 말이 아니고 ‘생각을 바꾼다’(a change of mind)는 의미입니다. ‘복음’(gospel)은 ‘유앙겔리온’(euanggelion)인데 그것은 ‘굿 뉴스’, ‘기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헬라말로 정확하게 풀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결정적인 기회가 왔다! 세속의 질서가 아닌 새로운 하늘의 질서가 곧바로 네 앞에 있다. 생각을 바꾸어라! 새로운 질서를 받아들여라! 그것이 네가 믿어야 할 기쁜 소식이다!”
예수는 기쁜 소식으로서 ‘하늘나라’를 이 땅 위에 선포했지, 결코 기적을 행한 마술사가 아닙니다. 그의 기적을 행하심은 오직 하늘나라의 임하심을 보여주기 위한 상징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말합니다.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가락에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눅 11:20) 하나님의 나라는 먼 미래에 내려올, 하늘에 걸려 있는 비행접시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기적 행하심의 손끝에 이미 와 있습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오늘 우리의 현실 속에서 실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6·25는 분단의 비극을 영구화시켰으며, 휴전 즉 트루스(truce)라는 최악의 결론을 조선의 민중에게 선사하였습니다. 휴전은 전쟁 중이라는 뜻이며 잠깐 쉰다는 뜻입니다. 1953년 7월 27일의 휴전협정은 이후의 모든 역사 전개가 ‘전쟁 중’에 있다는 것을 선포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평화협정’이 아니었습니다. 남한과 북한의 정치적 지도자들은 ‘휴전’을 빌미로 민중을 억압했습니다. 온갖 흉악한 정치 이데올로기의 귀신들을 인민의 심령 속으로 주입시켰습니다. 그런데 그 귀신들을 쫓아낸 것은 다름 아닌 ‘조선 민중의 손가락’이었습니다. 그 손가락 끝에 이미 천국이 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토록 억압하고, 못 보게 하고, 말 못하게 하고, 생각하지 못하게 하고, 행동하지 못하게 만들었는데도, 4·19혁명, 5·18광주민중항쟁, 6월민주항쟁을 거쳐 드디어 2016년 겨울 촛불혁명을 성취해내고야 말았습니다.
유신독재의 주인공이며, 사랑하는 친구의 총구의 연기와 함께 비명에 사라진 박정희 대통령! 한국 현대사의 영욕을 한몸에 지닌 인물이지요. 그의 신화는 사라졌고, 그의 따님 박근혜 대통령은 영어의 몸이 되었습니다. 민중 한 사람 한 사람이 자발적으로, 의식적으로, 평화적으로 치켜든 촛불이, 이 휴전 동토의 땅을 덮고 있는 두꺼운 얼음을 녹이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만났습니다. 만났습니다. 남과 북의 지도자가 판문점 경계선에서, 그리고 평화의 집에서 만났습니다.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이래 남북의 지도자 간에 직간접 만남이 꾸준히 시도되었지만, 2018년 4월 27일의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만남은 이전의 정상회담과는 좀 성격이 다릅니다. 북한의 지도자가 최초로 남한의 땅으로 넘어왔다는 것도 이례적 사건이지만, 만나서 헤어지기까지 12시간의 모든 과정이 대부분 다양한 채널을 통해 낱낱이 공개되었습니다. 실상 김정은과 문재인은 부자지간만큼이나 나이 차이가 있습니다. 이날 김정은 위원장의 공손하고 성실한 자세는 대한민국 민중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두 지도자의 정략적 만남이 아니라 민중의 메타노이아, 민중의 생각 바꿈의 상징이었습니다. 그 상징의 배경에는 촛불혁명의 강력한 힘과 갈망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만났습니다. 드디어 만났습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만났습니다. 그것은 북미 역사상 최초의 정상회담이며 냉전질서 속에서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세계사의 일대 전기였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에 체제안전보장을 약속하였고, 김정은 위원장은 한반도에서의 완전한 비핵화를 약속하였으며,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을 4·27판문점선언에 따라 추진한다는 것을 쌍방이 합의하였습니다.
이러한 합의문의 내용이 얼마나 구체적인 성과를 낼 것인가 하는 것에 관해서는 세계 정치사의 흐름과 관련하여 세부적인 논의를 요하는 것이지만, 확실한 것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이 조선 땅에 임하였다는 것입니다. 한국 민중들은 전쟁의 공포 대신 평화의 안도감을 구가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의 민중들은 그 어려운 휴전과 군사독재와 혼란의 정국 속에서도 세계 10위권에 꼽을 수 있는 문명의 높은 질을 성취하였으며, 민주의 열망으로 평등한 사회의 이상을 꾸준히 구현하여 왔으며, 발랄한 예술창작, 드라마, 춤, 노래, 전통예술공연으로 세계인을 감동시켰습니다.
이제 조선 민중은 자기들의 인고의 불안한 삶이 세계열강들의 인위적인 작위에 의한 냉전의 결과라는 것을 자각하고 ‘메타노이아’를 통하여 ‘유앙겔리온’ 곧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 민중의 터무니없는 희생으로 만들어진 세계 냉전질서 그 자체를 세계 인민의 삶으로부터 걷어 내버리는 작업에 팔뚝을 걷고 발 벗고 나서기 시작한 것입니다. 와이즈멘이 실현하고자 하는 에큐메니즘의 정신과 와이즈멘이 구현하고자 하는 세계평화를 실현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조선 땅 남북의 화해는 곧 인류 평화의 새로운 에포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그의 수난의 비극을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향하기 전에 사랑하는 제자들과 베드로를 향해 매우 가혹하게 야단칩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막 8:33) 그리고 또 말씀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막 8:34)
마가의 예수전은 부활을 말하되 부활을 기술하지 않습니다. 부활보다는 십자가의 수난을 부각시킵니다. 부활을 부각시킨 것은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물론 바울도 십자가 없이는 부활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 예수는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를 수 있는 신앙인의 자세로서, ‘자기를 부인할 것’을 말합니다. 여기 ‘자기의 부인’, 즉 ‘디나이얼 어브 셀프’(Denial of Self)라는 것은 불교가 말하는 삼법인(三法印) 제법무아(諸法無我)의 ‘무아’(anatman)와 같은 의미입니다. 세속적 집착의 모든 것을 버리지 않는 한, 인간은 십자가를 질 수 없습니다. 그 십자가는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예수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21세기의 나, 그 나 자신의 삶의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너 자신의 십자가를 걸머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합니다. 조선 민중의 십자가는 냉전의 극복이며, 모든 이데올로기의 방하착(放下着)이며, 남북의 화해며, 인류의 평화입니다.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말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子曰: 仁遠乎哉? 我欲仁, 斯仁至矣。”(뭐~ 인이 멀리 있다구? 내가 진짜로 인을 원하기만 해봐라! 인은 곧 나에게 달려온다구!-「述而」 29) 나에게로 곧장 달려오는 ‘인’(仁), 그것이 무엇일까요? 나는 감히 말합니다. 공자가 말하는 인의 궁극적 의미는 예수가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공자의 인이 곧 천국이고, 하나님의 나라이고, 하늘의 질서입니다. 공자는 그것을 철저히 인문주의적 전통 내에서 말했을 뿐입니다.
제가 앞에서 마가복음에는 부활의 기술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마가의 원 희랍어 텍스트는 16장 8절에서 아주 극적으로, 갑자기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그 마지막 구절은 이와 같습니다. “무덤 속에 들어갔던 여자들이 심히 놀라 떨며 나와 무덤으로부터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복잡한 성서 텍스트의 문제는 제가 말하지 않겠습니다. 마가복음의 최종적 사실은 부활이 아니라 ‘빈 무덤’입니다. 나는 이 ‘빈 무덤’의 ‘빔’을 노자(老子)의 ‘허’(虛)로 해석합니다. 노자가 말하는 ‘허’는 물리적 공간의 ‘빔’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의 순환에 내재하는 무한한 생명의 순환, 그 부활의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삶을 초월주의적으로, 종말론적으로 해석하는 데만 너무 익숙해 있지요. 진정한 기독자는 성서 해석에 앞서 자기 마음을 비울 줄 알아야 합니다. 모든 편견을 버릴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평생을 동·서양의 고전을 공부해왔습니다. 지금 제가 펼치는 논리는 여러분께 몇 년을 강의해도 모자라는 내용입니다. 시간이 벌써 다 되어가는군요. 여기서 저는 저의 기조강연을 마무리지어야 할 것 같습니다.
1922년, 미국 오하이오 톨레도에서 결성된 국제와이즈멘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모든 인간에게 더 나은 세계를 만들어간다.”라는 신념하에 창설되었습니다. 1922년은 소비에트 유니온이 창설된 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안다는 것 자체가 매우 지난한 과제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만 해도 성서는 일반 사람이 읽어서는 아니 될 문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아는 크리스천이 거의 없었다는 얘기지요. 그의 종교개혁의 핵심 과제가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일반인들이 라틴어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 예수님의 말씀을 접하게 해주는 작업이었습니다. 루터의 독일어 번역 성경의 출현이 곧 모든 프로테스탄티즘의 원점이 되는 것입니다. 그 뒤로도 성서는 제대로 해석이 되질 않았습니다. 20세기 성서신학, 즉 비블리칼 테올로지(Biblical Theology)의 발달로 비로소 성서의 의미가 자유롭고 개방적인 논단 위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양식사학(Formgeschichte, Form Criticism)과 같은 성서신학의 방법론 덕분에 비로소 우리는 성서의 본래의 모습을 비판적인 안목에서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배타성’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창구를 교회 체제 중심의 독단으로 닫아버리는 것입니다. 현재 불교계의 가장 큰 문제점 또한 ‘대승보살정신’의 상실입니다. 이슬람도 너무 교조화 되어가고 있고 개방성을 잃어만 가고 있습니다.
저는 와이즈멘 인터내셔널이 이러한 숨막히는 분위기에 세계 평화를 위한 새로운 봉사의 장을 넓혀갈 것을 촉구합니다. 일본 와이즈멘 나라 신 선생의 봉사정신이 없었더라면 오늘 한국의 고전학자 도올 김용옥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때 우리 조선 학생은 ‘쵸오센진’(朝鮮人) 혹은 ‘센진’(鮮人)이라고 경멸의 대상이 되었으며, 유학생들도 중앙정보부원들의 감시 대상이었습니다. 저의 많은 유학 동료들이 남산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고문을 당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나라 신 선생의 보호는 저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는 와이즈멘 여러분들께 깊은 감사의 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탈리다쿰’(Tali-tha cumi), 이것은 예수께서 죽어가는 아이의 손을 잡고 외치신 말씀입니다. 예수의 일상 언어인 아람어지요. 그것은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막 5:41)라고 번역됩니다. 저는 말합니다: “탈리다쿰!” “탈리다쿰!” “탈리다쿰!” “와이즈멘이여! 일어나라! 친교(Fellowship)와 교양(Culture)과 봉사(Service)를 위해 일어나라! 모든 권리는 의무의 이행에서!”
감사합니다.

 
 
 

2018년 10월호(통권 718호)

이번호 목차 / 지난호 보기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