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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22년 4월호)

 

  ‘공정성’ 개념으로 본 청년 실업과 젠더 갈등, 무엇이 문제인가
  

본문

 

몇 가지 질문

최근 들어 ‘이대남’(20대 남성) 또는 ‘2030 세대’(20대와 30대 청년층)와 관련한 사회적 담론이 더욱 활성화되고 있다. 그 직접적 계기는 인천국제공항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논란(2017년 5월), 평창 동계올림픽 ‘남북 단일팀’ 구성(2018년 2월)이나 ‘조국 사태’(2019년 8월) 국면에서 제기된 ‘불공정’ 논란, 그리고 특히 서울과 부산에서 있었던 보궐선거(2021년 4월) 결과였다. 보다 구체적으로 2016-17년 ‘촛불혁명’의 결실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나 민주당의 기대와 달리, 현재의 청년 세대가 ‘증오/혐오’ 분위기와 함께 민주당 지지를 철회하고 보수(수구) 야당인 국민의힘을 대대적으로 지지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서울에서는 오세훈 후보가, 부산에서는 박형준 후보가 시장으로 당선됨으로써, 그 직전 해에 치러진 총선 및 보궐선거(2020년 4월) 때만 해도 민주당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던 분위기를 180도 뒤집었다.
이 결과는 민주당 주도의 정계는 물론 한국 사회 전반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2022년 3월의 20대 대선은 물론, 향후 한국 사회의 향방에 청년층이 상당한 영향을 행사함으로써 1980년대 이후 점진적으로 전개된 민주화 과정이나 현재의 복지사회 건설에 중대한 ‘차질’이 생길 것으로 보인다.
한편, 현재의 청년 세대는 통일된 흐름을 보여주기보다 특히 ‘젠더’ 차이를 뚜렷이 보인다. 즉, ‘이대남’이라는 용어 자체가 암시하듯, 남성과 여성 사이에 정서, 의식, 태도, 선호, 행동의 차이가 상당하다. 페미니즘을 둘러싼 논란도 이런 면과 관련이 크다.
요컨대, 오늘날은 과거와 달리 이념이나 지역 이슈보다는 세대나 젠더 이슈가 사회적, 정치적 균열의 경계선 역할을 하고 있다. 세대 갈등 혹은 젠더 갈등이 우리 사회에 나타난 새로운 형태의 ‘태풍의 눈’이라는 얘기다. 최소한 표면상으로는 그렇다.
이런 맥락에서 다음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첫째, 현재 20-30대 청년층은 왜 ‘불공정’ 문제를 제기하며 ‘민주화’ 또는 ‘복지화’ 흐름을 주도하려는 정당에 등을 돌리고 오히려 그에 반하는 정당을 더 지지하게 되었나? 둘째, ‘이대남’으로 상징되는 젠더 차이 내지 젠더 갈등은 근본적으로 무엇이 문제이며,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

청년층이 느끼는 ‘(불)공정성’-현상과 본질

첫 질문에 답하려면 현재 20-30대 청년층의 사회적 형성 과정을 살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이들이 공유하는 ‘공정성’ 개념의 본질을 짚어낼 필요가 있다. 그래야 ‘청년의 보수화’도 해명된다.
우선, 주로 20-30대 청년층이란 대체로 1980년 이후 2000년 사이에 출생해 성장한 세대이다. 물론 개인별 경험 차이(특히 빈부 격차)는 있지만, 이들은 대체로 1980년대 이후의 ‘민주화 운동’ 분위기 속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며 자랐다. 이들의 부모는 이른바 ‘86세대’(60년대 출생으로 80년대 대학 시절에 민주화 운동을 많이 한 세대)가 많다. 동시에 이들은 1990년대 이후 이른바 ‘대중소비’ 시대를 비교적 많이 누리며 자랐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도 급성장했다.
한국 경제의 흐름을 볼 때 1987년부터 1996년까지의 10년은 최고의 성장률을 달성한 절정기였다. 물론 1997-2001년에 ‘IMF 경제위기’로 인한 대량실직 공포가 이들에게도 간접적 피해와 트라우마를 남긴 점도 무시할 수는 없다. ‘돈’(교환가치)을 최고 가치로 보는 물신주의(fetishism)가 강해진 배경이다. 이는 우치다 타츠루 교수가 『하류지향』에서도 통렬히 지적한 바다. “나는 이만큼 지불하는데 선생님은 무엇을 줄 건가요?” 이런 식이다. 요컨대, 이들의 성장 환경은 공동체와 절약정신과 연대의식이 약화되고 개인주의, 소비주의, 물신주의, 피해의식이 강화되는 풍토였다.
이런 배경에서 이들이 오늘날 불공정하다고 느끼는 현실은 어떤가? 몇 가지 예를 보자.
첫째,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5월 당선 직후, 인천국제공항의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겠다고 약속해 ‘공정성 논란’이 일었다. 청년들이 ‘불공정’하다고 여긴 핵심 두 가지는 이랬다. 먼저는, 공공부문 정규직은 그냥 된 것이 아니라 힘든 시험을 거쳐 치열한 경쟁을 뚫고 된 것인데, 그런 과정 없이 대통령이 나서서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바꿔준다니 논리적으로 납득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다음은, 청년들은 지금도 도서관이나 학원에서 힘겹게 취업준비생으로 살고 있는데, 비정규직이 정규직 자리를 차지하면 당장 자기들이 들어갈 자리(기회)가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둘째, 2018년 2월 평창에서 열린 동계올림픽 경기에서 남한과 북한이 아이스하키 단일팀을 구성하게 됐을 때 불공정 이슈가 일각에서 제기됐다. 남북한 단일팀이 아니라 남한 단독팀을 구성했다면 얼마든지 ‘국가대표’로 뛸 수 있었던 선수들이 기회를 잃었다는 문제제기였다. 또한 국제 경기 중에서도 올림픽은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기량을 겨루는 공간인데, 그 대표팀을 구성하는 데 있어 ‘실력’이 아닌 다른 기준(남북 평화 무드)으로 선수를 선발했다는 것도 지적되었다. 게다가 급조된 팀은 성공적인 경기에 필요한 팀워크나 호흡 맞추기에 대단히 해롭다는 것이었다.
셋째, 2019년 8월 초 문재인 대통령이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을 법무부 장관으로 지명했을 때 공정성 논란이 제기되었다. 당시 조국 수석은 검찰개혁과 공수처 설치에 대한 구상과 의지를 명확히 갖고 있었다. 이런 면에서 개혁 대상이었던 검찰 조직과 보수 우익 정치가들은 조국 법무부 장관을 절대 수용할 수 없었다. 반면, 청년들은 조 수석이 그동안 각종 사회활동이나 SNS 등에서 보여준 청렴하고 정의로운 면과 달리 그 자녀들의 스펙 관리(스펙 품앗이, 영어 논문 1저자 등재 등)나 사모펀드 관련 의혹 등을 거론하며 ‘위선’ 가득하다며 비판했다.
넷째, 이런 개별적 사례만이 아니라 청년층이 느끼는 전반적 삶의 현실 역시 불공정 투성이다. 예컨대, 고등학교까지 12년간 ‘열심히’ 공부하고 들어간 대학에서는 부모 세대처럼 낭만이나 지성을 누릴 틈도 없고, 노동시장은 ‘고용 절벽’이라는 말이 대변하듯 청년들에게 좋은 일자리를 제공하지 않는다. 또 강원 랜드 등 공기업 등에서의 채용 비리가 다반사인데다가 최근엔 부동산 가격까지 폭등했다. 이제 집 장만은 물론 연애, 결혼, 출산 등 기존 세대가 당연하게 누리던 꿈까지 포기해야 하는 ‘N포 세대’로서의 자괴감도 크다. 연애, 결혼, 집, 가족 등은 과거 기성세대가 웬만히 노력하면 얻었던 ‘보통재’였는데, 이제는 상황이 달라져 청년들에게는 ‘사치재’가 된 셈이다. 그러니 청년들에게는 만사가 불공정하게 보인다.
이 외에도 청년들이 느끼는 한국 사회의 불공정 현상은 무수하다. 이제 전술한 대표 사례들을 중심으로 그 본질을 살펴보자.
첫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와 남북한 단일팀 구성이 불공정하다고 느끼는 것은 자본주의 ‘노동시장’ 논리 안에서 그렇다. 노동시장이란 무엇인가? 자본주의에서 노동력이라는 상품(노동 능력과 노동 의욕)을 사고파는 공간이다. 여기서 개인은 각자가 가진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가치’를 올리는 데 혈안이 되며, 모두들 ‘제값’을 받고 팔고 싶은 욕구를 가진다. 시장은 형식상 ‘등가교환의 법칙’이 적용된다. 상품과 화폐의 교환은 동등한 가치량끼리 이뤄진다는, 시장거래 논리! 이를 맹신하는 것이 물신주의(fetishism)다. 이런 면에서 정규직이나 취준생의 관점에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나 남북 단일팀 구성은 그 정치적, 사회적 의미와 무관하게 악질적인 ‘부등가교환’으로 보인다. 즉, 청년들이 느끼는 불공정이란 자본주의 노동시장 논리 안에서의 문제이지 그 너머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나오는 물신주의의 산물인 것이다.
둘째, ‘조국 사태’ 때 제기된 불공정과 비일관성은 조국 본인의 공적인 행보와 사적인 생활 사이의 간극에서 오는 문제였다. 필자 역시 한 언론의 칼럼(“누가 조국에게 돌을 던지나”)이나 졸저 『경쟁 공화국』에서 교육이나 자본 문제와 관련한 조국 가족의 ‘대안적 노력 부족’을 꼬집은 바 있다. 그러나 이는 법적 단죄나 장관 자질 검증의 기준이 아니다. 실은 검찰개혁이나 공수처 설치를 반대하는 진영의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저항, 또 모종의 집단 지원을 받는 보수 우익 대학생들의 ‘안티 조국’ 분위기에서 나온 것이다. 특히, 여전히 재판 중이지만, 표창장 위조 문제나 사모펀드 의혹과 관련해서는 검찰의 무리한 기소가 있었다. 그러나 사연이 어떻든 자녀를 위한 스펙 품앗이나 영어 논문 1저자 등재 등은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필자는 이 사례를 ‘촛불혁명’ 완수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봐야지, 신이 아닌 한 개인에게 완전무결함을 요구할 일은 아니라 본다.
여기서 나는 북유럽 시민사회에 통용되는 ‘얀테의 법칙’을 떠올린다. ‘얀테의 법칙’이란 요컨대 공동체를 이루며 살기 위해서는 ‘나만 똑똑하다고 생각지 말라.’는 얘기다. 우리는 누구나 나름 똑똑하기도 하고 동시에 어떤 면에서는 어리석기도 하다. 굳이 자기 자신이 완벽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타인에게도 완벽을 요구할 순 없다. 찰리 매커시의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이라는 책에는 “가장 심각한 착각은 삶이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는 말이 나온다. 요컨대, 누구나 인간 존엄성과 평등을 원한다면 대학 입시나 노동시장에서 요구하는 ‘스펙’의 허상을 깨달아야 하고, 사람을 ‘노동력’의 관점이 아나라 ‘인격체’의 관점으로 봐야 한다. 우리 모두는 불완전한 존재로, 서로 배우고 격려하며 한 걸음씩 나아가는 학습인일 뿐!
셋째, 청년층이 느끼는 삶의 현실, 즉 재미없는 대학 생활, 고용 절벽, 채용 비리, 집값 폭등, ‘N포 세대’ 현상 등은 기성세대인 어른들에 비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만든다. 그러나 이는 굳이 청년세대와 기성세대를 대비해 파악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말기’에 이른 자본주의가 빚어내는 모순으로 봄이 옳다. 즉, 자본주의 초기 및 성장기에는 공장을 지어 상품을 만드는 족족 다 팔렸다. 그러나 지금의 자본주의는 사실상 말기다. 이제 세계시장도 거의 포화상태고 자원도 고갈 직전이다. 만성화된 불평등(빈부격차)과 지구온난화, 기후위기, 쓰레기, 미세먼지 등은 그간의 자본주의가 더 이상 예전처럼 지속되기 어려움을 암시한다. 지금의 청년세대는 바로 이 지점에 있기에 매우 힘들다. 기성세대 탓만 해서는 안 된다. 물론 채용비리나 부정부패 문제는 당연히 척결돼야 한다. 알고 보면, 이는 기존의 보수 기득권만이 아니라 민주당 정치가들도 해당된다.
물론 청년들이 경험하는 척박한 현실, 특히 ‘N포 세대’로 지칭되는 현실은 절망적이다. 그러나 이는 결코 특정 세대나 집단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 전반의 문제다. 말기 자본주의, 특히 팽창 여력이 별로 없는 상황에서 ‘레드 오션’을 둘러싼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기술 혁신의 가속화로 갈수록 다수가 ‘잉여’로 내몰린다. 따라서 대안은 결코 자본주의 노동시장 안에 없다! 청년도 꿈을 꾸고 미래를 계획하려면 힘겹더라도 ‘탈(脫)자본’의 상상력을 가동하기 시작해야 한다. 일례로, 찰리 매커시가 위의 책에서 말한 것처럼, 인생 최고의 멋진 깨달음은 “지금의 나로 충분함”을 알아차리는 것!

‘이대남’으로 상징되는 젠더 갈등의 본질

‘이대남’이란 20대 남성을 일컫는다. 청년층 중에서도 남성. 얼핏 ‘젠더 갈등’의 상징처럼 보인다. ‘이대남’은 20대 여성 내지 50-60대 남성과는 현저히 구분되는 사회적 특성을 갖기에 단순한 인구통계상 명칭이 아니다.
우선, 이 용어가 특별히 부각된 것은 2021년 서울과 부산에서 치러진 시장 보궐선거 직후다. 20대 남성들이 보수당 후보를 대거 지지한 것이다. 그런데 ‘이대남’ 호명을 널리 퍼뜨린 주체는 크게 두 부류다. 우선, 주류(우익) 언론과 정당은 ‘이대남’ 담론으로 남성 청년층을 민주당 정부와 이간시킴으로써 기득권층의 파워를 키우려 했다. 또한 ‘86세대’로 통칭되는 기성세대(50-60대)가 선거 패배를 ‘이대남’ 탓으로 돌리기도 했다. 민주당의 사과에도 불구하고, 이런 분위기는 20대 청년들로 하여금 기성세대에 대한 증오감, 반발감을 더욱 키웠다. 그러나 이 문제를 보다 크게 보면, 기득권층과 기성세대가 근본적인 사회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이대남’ 프레임으로 치환·은폐하려 한 것이다.
그렇다고 ‘이대남’ 특유의 성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대남’이라는 명칭이 통용된 근거는 이렇다. 우선, 오늘날에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남아 선호’ 사상이 약해졌다. 이제는 성평등 의식이 고조됐고 각종 시험에서 동년배 여성이 남성과 같거나 우수하다. 설상가상으로, 공공부문 취업 시 존재하던 ‘군 가산점제’에 대한 위헌 판결로 상실감도 크다. 이대남은 이제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한 느낌일 것이다. 결국 이들은 피해의식을 느끼면서 20대 남성으로서의 집단 정체성을 강하게 공유한다. 이 상황에서 기득권층과 기성세대, 페미니즘 등이 ‘이대남’을 집중 공격하자 이들의 반발도 더욱 거세진 것이다.
실제로, KBS가 2021년 5월에 청춘·장년 남녀 1,200명을 대상으로 실태 조사한 바에 따르면, 20대 남성들은 다른 집단(20대 및 50대 여성, 50대 장년)에 비해 보수 내지 차별 의식이 더 강했다. 이들은 학력이나 성, 출신 대학의 위상 등에 따른 임금 격차, 그리고 환경보다 개발에 모두 강하게 찬성했다.(40% 이상) 반면, 포괄적 차별금지법이나 성평등 정책에 대해서는 40-50%가 반대했다. 흥미롭게도, 청년층은 기성세대에 비해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줄 의사”가 낮았는데, 특히 부유층 청년일수록 더 낮게 나타났다.
앞서도 설명한 바, ‘이대남’ 현상은 자본주의 노동시장(능력주의, 성과주의)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여러 모로 불리해진 20대 남성들이 탈락의 공포(배제·잉여의 두려움)로 말미암아 자본주의 등가교환 법칙상의 ‘공정성’ 개념을 강하게 내면화함으로써 오히려 ‘차별에 찬성’하는 경향까지 드러낸다. 앞의 예처럼,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반대하거나 남북 단일팀 구성을 반대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불행히도 이는 자본주의 노동시장 및 능력주의를 신봉하는 정치 세력에 대한 지지로도 이어진다. 2021년 서울, 부산의 보궐선거 결과가 바로 그 증거다. 같은 맥락에서 동일한 ‘이대남’도 (민주·진보 진영이 아닌) 보수 우익 진영의 부정부패나 비리에 대해서는 대체로 침묵으로 일관한다. ‘이대남’이라는 정체성으로 집단행동을 하는 그룹 자체가 보수 우익 진영의 일부라는 이야기이다. 이를 증명하듯, 조국의 딸 조민의 학력 의혹에 대해서는 검찰이나 보수 언론의 녹음기 노릇을 하던 이들이 윤석열의 아내 김건희의 학력 의혹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했다. 물론 이는 ‘이대남’만이 아니라 ‘페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정의나 공정성이 ‘선택적’이라는 비판을 받는 근거다.
요컨대, ‘이대남’으로 상징되는 젠더 갈등의 본질은 자본주의 노동시장과 능력주의 경쟁의 프레임 안에서 소외, 패배, 탈락, 배제, 잉여의 두려움을 극심하게 느끼는 20대 남성들의 사회적 인정에 대한 갈망이 왜곡된 형태로 드러난 것이다. 특히, 이들이 ‘가해자-피해자’ 프레임에 갇히면, “밤길이 여성에게만 무서우냐? 남자도 무섭다.”는 식으로 서로 피해자 되기 경쟁을 한다. ‘N포 세대’라는 말도 맥락에 따라서는 피해의식만 강화하기 쉽다. 따라서 ‘피해의식’의 덫에서 벗어나는 것, 나아가 가부장제, 마초주의, 노동시장, 능력주의 등에 근거한 공정성 개념을 벗어나 마침내 ‘인간 존엄성’에 기초한 평등의 가치 내지 인간성 개념을 회복하는 것이 대안의 돌파구다.

맺는말-상처와 두려움의 고백

그 어떤 논의에도 불구하고 ‘이대남’을 포함, 청년 세대의 상황이 어렵고 이들이 겪는 불안감과 스트레스가 높다는 것에 우선 공감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 원인이나 해결책을 둘러싸고는 깊은 성찰이 절실하다.
우선, 젠더 갈등이나 세대 갈등의 문제로 이 사태를 바라보아서는 곤란하다. 즉, 청년층의 삶의 여건이 불리하게 된 것은 청년층 ‘탓’도 아니지만, 결코 기성세대 ‘탓’도 아니다. 물론 ‘정규직 65세 정년’이 청년의 기회를 뺏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모두 (비)정규직이 된다고 풀릴 문제는 아니다. 자본주의 노동시장과 능력주의 프레임 안에서는 탈출구가 없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다음으로, 청년층이 굳게 믿는 ‘공정성’ 개념을 상대화할 필요가 있다. 즉, 이것은 인간성에 토대한 평등이나 인간 존엄성과는 다른 차원이다. 그것은 차라리 자본주의 노동시장과 능력주의에 토대한 차별의 근거다. 이는 어려운 시험을 거친 자가 더 많은 혜택을 누리는 원리, 차별을 찬성하는 논리다. 이런 노동시장 및 능력주의 프레임 안에서는 상하 간 자리바꿈만 있을 뿐, 차별의 사다리 질서는 영구화한다. ‘공정한’ 자본주의라도 그 자체는 차별적이다.
이런 면에서 더욱 거시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지난 500년간 자본주의는 다양한 형태로 사회를 통치·관리해 왔다. ① 왕정제, ② 군 독재, ③ 민주제, ④ 복지제, ⑤ 친환경의 형태다. 보수 우익은 ①, ②를 선호하고, 민주 진보는 ③, ④, ⑤를 지향한다. 중요한 점은 ①, ②건 ③, ④, ⑤건 모두 자본주의 체제 관리 방식의 한 형태라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노사 간 세력관계에 따라 그 스펙트럼을 유연하게 조절한다. 그러나 그 관리 형태와 무관하게 자본주의는 근본적으로 경쟁과 차별의 토대 위에 무한 이윤을 추구한다. 따라서 아무리 겉으로 민주화, 복지화, 생태화가 이뤄져도 자본주의 원리(돈벌이 경쟁, 차별, 파괴, 이윤) 자체를 넘어서지 못하면 여전히 우리는 자본의 속박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N포 세대’로 내몰린 청년층의 열악한 현실이 특정 성별이나 기성세대 ‘탓’이 아님이 더 명확해진다. 오늘의 열악한 현실은 집단 간 상황 차이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말기 자본주의’의 한계와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치 노예제나 봉건제가 역사적으로 사라진 것처럼 자본제도 이제 역사적인 종점에 가까웠다. ‘생로병사’는 우주만물을 관통하는 법칙이 아니던가.
따라서 청년층 문제를 고민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 전반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는 것으로 이어져야 한다. 즉, 성별, 나이, 학력, 지역 등에 따른 다양한 차별 구조를 타파하면서도 기득권 자체를 제거함으로써 굳이 기득권 경쟁을 할 필요가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 이것이 대안이다. 다른 말로, 자본주의 노동시장 및 능력주의 프레임을 넘어 인간 존엄성에 기초한 평등 세상, 나아가 (자연·농지 파괴를 동반하는) 성장과 개발 지상주의 패러다임을 버리고 생명 평화의 패러다임을 여는 것, 비록 소박하게 살더라도 인간적인 소통과 연대를 실천하면서 자연의 품에서 겸허하게 사는 것, 이것이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 할 대안적 방향이다. 이런 방향 속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종교 등 각 분야별 구조 혁신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토론해나가야 한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공동 책임이다. 소통과 연대가 필요가 까닭이다.
그러나 바로 이런 소통과 연대가 가능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서로 모여 둘러앉아 우리 내면의 ‘두려움’부터 고백하기 시작해야 한다. 각 개인이 가진 심층적인 두려움은 자본주의 이윤과 경쟁 시스템이 만들어낸 온갖 폭력과 상처(트라우마)에 기인한다. 낙인과 열등의 두려움, 차별과 배제의 두려움, 탈락과 좌절의 두려움이 우리를 감싼 채 부단히 우리 삶을 자본에 포박한다. 그리하여 탈자본과 같은 참된 대안에 대한 두려움까지 생긴다.
찰리 매커시의 책에서 소년이 말에게 묻는다. “마음이 상처받았을 때 어떻게 하지?” “그럴 땐 우정으로 상처를 감싸 안아. 상처받은 마음이 희망을 되찾고 행복해질 때까지 눈물과 시간을 함께 나눠.” 그렇다! 우정, 사랑, 눈물, 시간으로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면 두려움도 확연히 줄어든다. 남(男)-여(女)-노(老)-소(少), 우리 모두는 우주의 일부이자 존재 그 자체로 사랑받고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 따라서 공감과 우애가 소통, 연대, 희망의 씨앗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자본의 이성을 넘어 인간의 감성, 나아가 우주의 영성으로 전진할 때, 비로소 우리는 (단 하루라도) 진정 자유로운 삶의 주인공(인격체)으로 살 수 있다.
인간의 삶, 특히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자본주의 등가교환(시장거래)으로는 결코 이해되지 않는다. 청춘(靑春), 세상이 아무리 힘들어도 당신은 지금의 당신으로 충분하다! 부디 ‘내면의 자유’와 ‘삶에 대한 책임감’을 회복하여 ‘탈자본’의 새 세상 창조에 동참하시라!

강수돌|서울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독일 브레멘대학에서 노사관계를 연구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이장이 된 교수, 전원일기를 쓰다』, 『자본을 넘어, 노동을 넘어』, 역서로 『파국이 온다』 등이 있다. 고려대 융합경영학부 명예교수이다.

 
 
 

2022년 6월호(통권 76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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