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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특집 > [특집] 개선 시급한 한일 관계
특집 (2019년 6월호)

 

  해방 후 한일 기독교 관계와 역사적 책임의 문제
  

본문

 

한일 관계, 특히 기독교의 한일 관계는 1967년 일본기독교단의 “제2차 대전하에서 일본기독교단의 책임에 대한 고백”,1 이른바 ‘전책고백’의 발표가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한일 간 기독교 관계의 역사는 변화를 맞았으며, 미래 지향의 방향도 과거와는 전혀 다르게 전개된 것이 사실이다.

불행한 한일 기독교 관계의 역사
근대 역사에서 한국과 일본은 불행한 관계에 놓여 있었다. 이는 기독교 신앙을 공통으로 하는 기독교인 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신앙 안에서 형제자매의 관계이면서도, 각자의 입장에 따라 오랫동안 불화를 겪었다. 정치・사회・경제적으로 처한 입장이 달라도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기독교인 동지 간에는 조금은 다른, 특별한 관계나 공통의 목표를 설정하고 이행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섞인 진술이 간혹 나오기도 했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2
더욱 안타까운 일은 근대 이후 일본 기독교인들이 국가의 종교 정책이나 정치적 의도에 의해 그들 사회 내에서 차별받거나, 심한 경우 박해를 당하는 입장에 처했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다수의 일본 기독교인들은 국가에 저항하기보다는 오히려 국가 정책에 적극 가담하여 자신들의 입지를 조금이라도 공고히 하는 방향을 택했다. 이로 인해 일본 기독교는 결국 자국의 제국주의에 예속되는 길을 걷게 되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가장 중요한 국가적 목표이자 과제는 한반도에 대한 식민통치였다. 물론 일본 제국주의 역시 서구 제국주의와 마찬가지로 각종 경제적 이익과 정치적 우위를 점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제국주의의 후발 주자로서, 특히 역사적으로 특수한 관계에 있던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서는 특별한 명분이 필요하였다. 이에 전통적으로 중국의 영향과 지배를 받아온 한반도에 진정한 독립을 가져다주기 위한 중간적 조처로서의 한국통치론을 내세우거나, 혹은 서구 열강의 식민통치 위협으로부터 아시아의 독립권 수호, 동양의 평화와 신질서의 확립 등을 주요 명분으로 내걸었다.
그런데 일본의 대내외 정책에 적극 호응하여 일본 내 입지를 강화하고자 한 일본 기독교계 주류는 한반도에 대하여 전혀 다른 차원의 식민지 명분론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신의(神意) 병합론’, 즉 ‘약속의 땅으로서의 한반도’였다. 그들은 성서적 메타포를 사용하여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듯, 하나님이 일본에 약속하신 땅으로서의 한반도를 말했다. 일본 정치가들은 솔깃했다. 이는 일본 사회 안에서 기독교의 입지를 향상시키는 데 일부 기여했다. 즉 한반도 병탄 직후인 1912년에 일본 정부는 국가 정책에 적극적인 일본 기독교 대표들을 문부성에 초치하여, 불교계 대표 및 신도계 대표와 함께 ‘삼교 회동’을 이행했다. 일본 기독교 대표자들은 이를 국가가 자신들을 일본의 3대 종교로 인정한 사건으로 받아들였다. 이와 별도로 일본 기독교계는 ‘조합교회’를 중심으로 ‘조선전도론’에 근거하여 정부와 기업의 지원까지 받으며, 이른바 ‘식민지 전도’를 실행하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라 1919년 3・1운동 당시에도 주류 일본 기독교계는 한반도 기독교인들의 독립운동 참여를 신학적으로 비판하였으며, 이를 불순한 신앙에 의한 정치운동으로 치부하는 등 대부분 조선총독부와 같은 입장을 취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만 개인적 차원에서, 혹은 ‘제암리교회 사건’과 같은 학살 사건에 대해서는 인도적인 차원의 비판적 의견을 내는 정도에 머물렀다. 또한 일제 말기 한국 기독교의 가장 큰 시련 중 하나인 신사참배나 천황숭배 강요 문제에 대해서는 오히려 한국 기독교의 저항세력을 비판, 견제했다. 즉 같은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공동체이면서도, 국가의 ‘신사 비종교론’이나,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초종교론’을 적극 지지하며, 한국 기독교가 이를 수용해야 한다고 설득하는 과오를 범했다. 전쟁 협력 혹은 이른바 ‘전쟁의 복음’, ‘성전’(聖戰) 등의 논리로 파시즘 세력에 동조한 것은 다 열거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그런데 한일 기독교의 불행한 시기를 분석해나갈 때, 한국 기독교는 단지 피해자이고, 일본 기독교는 가해자라는 아이덴티티만을 강조하는 것은 일정 부분 문제가 있다. 특히 일제 말기에 들어서면서 한국 기독교의 신사참배와 천황숭배 실행 등 일제 정책에 대한 영합과 전쟁 협력의 정도는 강제에 의한 불가피한 수용의 범주를 완전히 벗어난다. 이런 측면에서 한일 기독교 관계의 역사가 걸어온 불행한 시기, 그리고 그 당시 한국 기독교의 책임에 대해서도 진지한 성찰과 반성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대부분의 지도자는 친일(親日)하였고, 다수의 교회는 순응하였다. 이에 대한 고백이나 회개는 오랫동안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방 이후 일본 기독교의 변화
1945년 이후 1960년대까지 일본 기독교는 내부의 여러 문제를 정리해나갔지만, 정작 역사적 문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 혹은 기독교로서의 올바른 정체성 확립 등과 같은 중요한 과제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예를 들어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 발표한 “일본기독교단 신일본 건설에 대한 선언”3이 바로 그것이다. 이 선언은 역사적 인식의 전환을 전혀 담지 못했다. 더구나 1945년 이전의 일본 기독교 문서에 자주 등장하던 ‘전쟁의 복음’이라든가, ‘성전’ 등의 용어가 어떤 프로세스를 거쳐 ‘평화의 복음’으로 전환되었는지를 설명하지 못한 문서였다. 일본 기독교는 이로부터 20년 이상 침묵, 내부적 조율에 골몰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한국과 일본은 여러 어려운 과정을 겪었으며, 1965년에는 소위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졌다. 그해 9월 일본기독교단의 의장 오무라 이사무(大村勇) 목사와 몇몇 대표, 그리고 재일대한기독교회의 이인하(李仁夏) 목사가 통역자로서 방한했다. 그들은 한국의 장로교단 중 진보적 교단인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총회를 찾았다. 그들은 총회 석상에서 일본기독교단의 역사적 과오를 사죄하고 양국 교회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 일은 그렇게 쉽게 진행되지 못했다. 일본의 대표적 교회사가인 하라 마코토(原誠)는 그날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이 체결되어 국교가 회복되었다. 그 직후인 그해 9월 25일 ‘한국기독교장로회’ 제50회 총회는 ‘일본기독교단 총회’ 의장 오무라 목사를 초대하여 총회 석상에서 인사하도록 허용했다. 그러나 다시 그 총회 석상에서 그의 인사를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기장’ 총회는 3시간 이상 난상토론을 벌였다. 처음에는 그 인사를 받지 않아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였으나, 회의 석상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이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죄를 사함받은 존재들인 바, 우리도 일본교회를 용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의견이 대두되었다고 한다.
이에 장내의 분위기가 바뀌고, 밖에서 기다리던 오무라 목사를 들어오게 하여 총회 축하와 인사를 받는 순서를 허락한 것이다. 그것은 ‘사죄’였다. 그 내용은 ‘일본 정부 및 국민이 범한 수많은 정치적인, 인권적인 죄악에 대해 일본교회로서 깊이 회개하는 것과 함께 마음으로 사죄한다’는 것이었고, 식민지 통치에 대해서 ‘전적으로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며, ‘일본 국민을 대표하여, 주 앞에서 깊이 사죄를 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해 12월에 ‘일본기독교단’은 ‘대한예수교장로회’, ‘기독교대한감리회’, ‘한국기독교장로회’에 서간을 보내어 대표자를 일본에 초청하고, 1967년 7월에 한국의 세 개 교단과의 협약 원안이 작성되었으며, 그 이듬해인 1968년 10월 ‘일본기독교단’ 제15회 총회에서 그 체결이 승인되었다. 그 후 양국 교회는 선교협약을 맺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4


위의 기록에서도 다소 엿볼 수 있지만, 당시 통역자로서 현장을 함께했던 이인하 목사가 오래전 필자에게 직접 전해준 1965년 당시 기장 총회의 상황은 극적인 것이었다. 갈등과 반전을 거듭한 끝에 결국 서로 눈물로 화해를 이루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오무라 이사무 목사를 대표로 하는 한국 방문단의 경험으로부터 일본기독교단 내부에서 전쟁 책임에 대한 고백의 움직임이 구체화되었고, 결국 1967년 3월의 부활절의 전책고백으로 이어졌다.

1967년 ‘전책고백’이 지닌 역사적 의의
1967년의 전책고백은 당시 교단 의장 스즈키 마사히사 개인 명의로 발표된 문서이다. 일부 교회사가는 이 문서가 당시 일본기독교단 내에 심각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고, 결국은 교단 총회 전체가 동의한 공식문서로 채택되지 못한 점을 들어 그 역사적 의의를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는 이를 좀 다르게 해석한다. 만약 이 문서가 교단 총회 석상에서 무조건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면, 그야말로 정치적 의도를 지닌 형식적 문서가 될 가능성이 더 높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인식의 전환은 토론과 갈등을 거치며, 많은 반대 의견을 품은 채 전진하며 이루어지는 것이 오히려 역사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전책고백이 수려한 문장이나 미사여구, 현란한 사죄의 용어로만 점철되어 말뿐인 고백이었다면, 그야말로 이 문서의 역사적 의의는 반감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기독교단은 이 전책고백을 발표한 직후, 적극적으로 일본기독교단의 사회참여와 선교의 방향을 수정하였다. 즉 당시 일본 사회의 가장 대표적인 소수 약자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실행해나간 것이다. 그 대상은 재일한국조선인, 오키나와인, 일본의 천민 계층인 브라크민, 그리고 일본의 소수 원주민인 아이누족이었다. 이러한 행보를 적극적으로 평가하면, 전책고백 이후에 일본 기독교는 그동안 보여온 주류 지향적 모습이나 국가나 권력, 다수자, 지식층 등을 향하여 기독교를 확산시키고 그 영향력을 확대하려던 자세에서 벗어나, 가장 약한 자들과의 동행을 결정하고 실천하는 쪽으로 거대한 방향전환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일본기독교단의 전책고백 이후, 중소 교파나 연합기구, 심지어 기독교와 직간접으로 관련을 맺은 사회단체들까지 한일 관계와 전쟁, 아시아에 관한 역사적 죄책고백을 이어갔다. 역시 소수이기는 하지만 일본 기독교계의 이러한 움직임은 일본 사회의 역사인식, 한일 관계의 흐름에서 그래도 긍정적인 측면에서 가장 역동적으로 작용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중에서도 일본의 대표적 기독교계 교육기관으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메이지가쿠인(明治学院)의 “전쟁책임 전후책임 고백”은 특기할 만하다. 이는 기독교계 교육기관으로서는 거의 유일한 역사적 죄책고백이며, 동시에 그 내용 또한 주목할 만한 측면이 있다.5

한국의 민주화운동의 역사와 일본 기독교, 한일의 다리가 된 사람들
군사독재 시기,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가장 적극적인 공헌을 한 이들 중 하나는 한국의 진보적 기독교인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가장 좋은 협력자요, 동지가 된 이들은 일본의 기독교인들이었다. 지명관, 고 박형규, 고 김관석, 고 오재식, 고 강문규, 고 이인하, 김용복, 안재웅, 권호경, 김경남, 박상증 등이 일본과의 협력 및 제휴의 선봉이 되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망명 교수로 25년 이상을 도쿄여자대학에 재직하며, ‘TK생’이라는 필명으로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집필, 한국 민주화운동 정보소통의 으뜸가는 공헌자가 된 지명관의 역할은 역사적이다. 그러나 그의 역사적 활동 배후에는 사명감을 지니고, 때로는 목숨을 거는 위험을 무릅쓰고 한국 기독교인 동지들을 지원한 일본 기독교인들의 역할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 밖에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 최초의 유학생으로 1960년대에 한국으로 건너와 연구와 목회, 특히 한일의 기독교 역사 연구와 ‘교회와 국가론’의 초석을 놓으며 활동하다가 결국 추방당한 사와 마사히코(澤正彦),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한일 간 화해의 징표를 자처하며 활동하던 구라타 마사히코(蔵田雅彦)의 존재를 간과할 수 없다. 그들은 나란히 젊은 나이에 지병으로 인해 세상을 떠남으로 한일 간의 더욱 강렬한 화해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다.
한일 간의 파고가 높고, 간극이 더 벌어질수록 두 나라 사이의 가교 역할을 했던 기독교 지도자들, 그리고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명을 다하는 화해자들의 존재를 상기해야 할 것이다.


1 “(전략) 삼가 우리 일본기독교단의 설립과 여기에 이어 전시하에 ‘교단’의 이름으로 범한 여러 가지 죄과를 오늘에 이르러 회개하고 자각하며, 주의 긍휼과 이웃의 용서를 간절히 구하는 바입니다. (중략) 우리는 ‘교단’의 성립과 존속에 있어서 우리의 나약함과 죄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도 활동하시는, 역사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기억하며, 깊은 감사와 함께 그 책임을 통감하는 바입니다. (중략) 우리는 온 교단의 이름으로 그 전쟁을 시인하고 지지했으며, 그 승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노력할 것을 안팎을 향해 성명한 바 있습니다. 진정으로 우리의 조국이 죄를 범했을 때, 우리 교회도 역시 그 죄 속에 빠진 것입니다. 우리는 파수꾼의 사명을 저버렸던 것입니다. 마음속 깊이 아픔을 느끼며 이 죄에 대해 참회합니다. 주께 용서를 비는 것과 함께, 세계를 향해, 특히 아시아 여러 나라, 또한 거기의 교회와 형제자매, 그리고 우리나라의 동포에게도 충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바입니다. 전쟁이 끝난 지 20년이 경과하고, 우리의 사랑하는 조국은 오늘날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이 세계 가운데에서 다시 우려할 수밖에 없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 점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교단’이 다시금 과거와 같은 죄에 빠져들지 않고, 일본과 세계에 지워진 사명을 바르게 수행할 수 있도록 주의 돌보심을 구하며, 내일을 향한 우리의 결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 1967년 3월 26일, 일본기독교단 총회 의장 스즈키 마사히사”
2 이런 측면에서, 2007년 9월 13일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총회원 일동이 발표한 ‘죄책고백서’는 역사적 의의가 크다. 죄책의 주요 책임 항목은 (1) 신사참배한 죄에 대한 회개, (2)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한 죄에 대한 회개, (3) 신사참배와 침략전쟁에 협력한 죄를 오랫동안 회개하지 않았던 죄에 대한 회개 등으로 요약된다.
3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가 중심이 되어 1946년 6월 9일 전국기독교대회 직전 이틀간 제3회 일본기독교단 총회가 개최되었다. 의장은 도미다 미츠루(富田満)에서 고자키 미치오(小崎道雄)로 교체되었으나, 임원, 총회원 등의 면면을 살펴보면 전시하 지도자들과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총회 첫날, ‘전도계획의 건’과 ‘신일본건설 기독교운동’이 제안되고,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그 이튿날 선언문과 결의문 등이 채택되었다. 그런데 이때의 안과 그다음 날 전국기독교대회에서 고자키 미치오가 낭독한 내용을 비교하면 결의사항은 거의 같으나, 선언문이 상당히 달라진 것이 발견된다. 그것이 누구의 손에 의해 수정되었는지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어쨌든 주목해야 할 점은 선언문 서두 “우리는 평화의 복음을 신봉하는 기독교인으로서”라는 부분이다. 1946년 6월 9일 “전일본기독교대회 선언, 결의” 참조.
4 하라 마코토, 서정민 역, 『전시 하 일본기독교사: 국가를 넘어서지 못한 일본 프로테스탄트 교회』(서울: 한들출판사, 2009), 6-7.
5 이 고백은 1995년 6월 일본의 패전 50주년을 기념하여 메이지가쿠인 학원장 나카야마 히로마사(中山弘正)의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기독교 학교로서 건학 정신에 배치되는 군국주의를 추종하여 전쟁에 협력한 죄, 특히 이 대학 출신이나 최고 경영자의 자리에서 예언자적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한국을 비롯한 이웃 나라, 일본의 민중, 더구나 자신의 학교 학생들까지 지키지 못하고 전쟁으로 내몬 선배들의 이름(도미다, 야노 등)을 직접적으로 거론하며 반성한 점은 특기할 사항이다. 또한 죄책고백문의 제목에서도 읽히듯이 전쟁책임뿐만 아니라, 전후 50년이 흐른 지경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사죄와 고백, 회개와 화해의 실천을 다하지 못한 전후 책임까지를 죄책으로 고백하였다. 이 문서 또한 같은 이유로 메이지가쿠인 전체의 공식문서로 발표되지 못하고 학원장 개인 명의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이 문서의 역사적 의의는 폄하되거나 상실될 수 없다. 이 고백문은 일본어뿐만 아니라 한국어, 중국어, 영어, 프랑스어 등으로도 번역되어 발표되었다.



서정민 | 연세대학교 신과대학과 대학원에서 공부했고, 일본 도시샤(同志社)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연세대에서 교회사를 가르쳤으며, 현재 일본 메이지가쿠인(明治学院)대학 교수, 동 대학 그리스도교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 『한일 기독교 관계사 연구』, 『한국교회의 역사』 등이 있다.

 
 
 

2019년 11월호(통권 73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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