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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18년 10월호)

 

  주체사상과 종교의 공존은 가능한가
  

본문

 

한국 사회 현실에서 주체사상에 대한 이해와 접근은 여전히 정서적인 부담을 떨쳐내기 힘든 주제이다. 이는 단순히 이념적 차원의 이질성과 배타적 환경 탓이 아니다. 이미 70년을 훌쩍 넘겨버린 분단과 그 구조 속에서 빚어진 갈등과 대립, 그리고 동족상잔으로 인한 상처가 구성원 개개인의 의식과 존재양식을 여전히 구속하고 있음을 뜻한다. 단순히 ‘트라우마’라는 용어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무의식적 의식’의 ‘자기규정’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주체사상과 종교의 공존 가능성 모색은 집단의식에 함몰된 ‘무의식적 의식’ 현상과 집단의식의 내면화를 추구하는 ‘의식적 무의식’ 현상 사이의 대화를 뜻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4・27판문점선언은 그 궁극적 목표인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체결이라는 결실 여부와 상관없이 시대적 전환의 의미를 담고 있다. ‘평화, 새로운 시작’이라는 구호는 ‘무의식적 의식’의 ‘자기규정’, 그 두꺼운 옷을 벗기는 휘슬로 들린다. “냉전의 산물인 오랜 분단과 대결을 하루빨리 종식시키고 민족적 화해와 평화번영의 새로운 시대를 과감하게” 열어나가고자 한다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공동선언, 그것은 단순한 언어적 수사 이상의 실체적이고 실존적 의미, 즉 ‘공존’의 ‘역사화’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주체사상과 북한 체제
찰스 암스트롱1은 『북조선 탄생』(The North Korean Revolution, 1945-1950)에서 북한 사회주의에 대해 독특한 시각을 보여준다. 이 책에서 그는 북한의 소비에트화 과정에 매몰되어온 전통주의적 접근에 대해 북한 사회주의 체제의 토착성과 내인성을 강조하고, 그 총체적 결실로서의 체제 내구성이 드러내는 함의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그의 이러한 해석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표현들을 간추려 옮기면 다음과 같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형성은 북한의 소비에트화가 아니라, 소비에트 공산주의의 조선화
- 소련의 개입은 역사의 절반만을 말해줄 뿐
- 북한 공산주의는 소비에트 모델에 비해 매우 독특할 뿐 아니라, 어떤 측면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거꾸로 뒤집은 것
- 전형적으로 북한이 물질적 상황보다 이념을 더욱 강조했다는 점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정반대
- 북한판 공산주의의 중심에는 민족주의와 대중주의가 강력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 북한은 형식에서는 스탈린주의였지만 내용적으로는 명백한 민족주의가 되었다.
- 다민족인 소연방의 정책이 ‘형식은 민족주의, 내용은 사회주의’인데 비해, 북한의 문화 형성은 반대로 ‘형식은 사회주의, 내용은 민족주의’였다.


그는 모든 국가와 지역에 대한 이해가 그 특수성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함을 강조한다. 북한 체제에 대한 그의 설명은 바로 그 특수성을 해명하고자 한 것이다. 물론 그도 2006년도 한국어판 서문에서 『북조선 탄생』에서 다룬 해방공간의 체제 건설과정이 지녔던 역동성과 활력은 점차 사라져가고, 체제 유지를 위한 방어기제만 강화되는 북한 사회의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소련의 지지 철회가 곧바로 그들 정권의 몰락을 가져온 동구권과는 달리, 사회주의권의 몰락이 북한의 정권 붕괴로 이어지지 않았고 북한 사회의 안정성과 내구성을 뒷받침한 제반 특성이 여전히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강조한다.
주체사상에 대한 이해의 출발점도 크게 다를 바 없다. 북한 사회의 특수성에 대한 기본적 이해가 요구된다는 뜻이다. 북한 공산체제 형성 기저에 민족주의와 대중주의가 강력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찰스 암스트롱의 시각은 주체사상의 형성 과정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특히 주체사상을 이론화한 것으로 널리 인정받는 황장엽의 주체사상 정립 노력의 궤적을 깊숙이 들여다보면 그 의미가 보다 명확해진다. 황장엽은 비록 그의 망명으로 ‘주체사상의 대부(代父)’라는 명망과 그 영향력을 잃었지만, 그가 추구한 주체사상의 ‘인민대중 중심주의화’ 업적은 부인할 수 없다.
김일성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5년 12월에 “사상사업에서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퇴치하고 주체를 확립할 데 대하여”를 발표하면서 소련파와 연안파, 그리고 남로당 등 정적을 제거하기 시작한다. 1956년 8월 종파사건을 정점으로 하여 불붙은 권력투쟁은 1966년 8월 12일 자 「로동신문」 논설인 “자주성을 옹호하자”라는 발표로 일단 막을 내린다. 이제 더 이상 김일성의 유일지배 체제를 위협하는 정치세력은 북한에서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유증은 남았다. 통치자로서의 김일성은 받아들이면서도, 경제발전의 지속을 통한 인민생활 향상 정책을 요구하는 정책 변화에의 열망은 잠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통치 집단 사이에서는 혁명의 과도기 성격 규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이념 논쟁이 불붙는다. 당시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으로 있던 황장엽은 이와 관련하여 “사회발전의 동력”이라는 논문을 김일성종합대학 창립 20돌 기념논문집(1966)에 실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 논문이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약화시키는 반당 수정주의적 글이라고 평가되어 총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른바 ‘5.25교시’라고 일컫는 김일성의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에로의 과도기와 프롤레타리아문제에 대하여”(1967. 5. 25.)에 의해 단죄된 것이다.
이후 황장엽은 그를 끌어내린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 독재 문제를 풀이하는 데 몰두한다. 그는 바로 이때 계급이론에 대한 성찰을 통해 계급을 중심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인간 자체를 중심으로 역사를 보고자 하는 인식의 전환을 도모하여 ‘인간중심철학’을 구상하고, “마르크스의 계급투쟁 및 프롤레타리아 독재 이론과 결별하고 인간과 인류에 충실한 인본주의자로 전환”하게 되었다고 스스로 밝힌 바 있다.2
결국 북한 사회는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가 이루어져서 과도기의 임무가 완수되어도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러나 그 과정의 희생자인 황장엽은 오히려 사상적 성찰을 통해 인본주의에 입각한 인민대중 중심주의로의 전환을 모색하게 되었다.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주체사상과 종교와의 대화
주체사상과 종교 사이의 공존이 이루어지려면, 우선 대화가 가능해야 한다. 이미 그 대화는 1980년대 초에 시작되어 1990년대 초까지 10년 동안 생각보다 깊이 있게 진행되었다. 이 시기는 북한이 중국의 개혁개방과 사회주의권의 변화를 감지하면서 보다 적극적으로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국제사회로의 진입로 모색을 추구하던 시기와 겹친다. 이를 가능하게 한 원동력은 김일성이 발표한 “우리 당의 주체사상과 공화국 정부의 대내외 정책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1972. 9. 17.)이다.
이 문건은 황장엽이 다시 김일성의 부름을 받아 1960년대 말부터 주체사상의 내용을 본격적으로 정립한 것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황장엽에 따르면 이 문건에서 주체사상에 관한 정의가 처음으로 주어졌다. “주체사상이란 한마디로 말하여 혁명과 건설의 주인은 인민대중이며 혁명과 건설을 추동하는 힘도 인민대중에게 있다는 사상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며 자기 운명을 개척하는 힘도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사상”3이라는 것이다.
이 문건을 발표하고 3개월이 지난 후, 북한 당국은 1972년 12월 25일부터 개최된 최고인민회의 제5기 1차 회의에서 사회주의헌법을 채택했다. 사회주의헌법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자주적인 사회주의 국가로 선포하고, “공민은 신앙의 자유와 반종교선전의 자유를 가진다.”(제54조)고 규정했다. 1992년 북한 사회주의헌법 개정 과정에서 이 조항은 “공민은 신앙의 자유를 가진다. 이는 종교 건물을 짓거나 종교의식을 거행하는 것으로 보장된다. 누구든지 종교를 외세를 끌어들이거나 국가사회질서를 해치는 데 이용할 수 없다.”(제68조)라는 내용으로 바뀐다. 이러한 변화는 분명히 1981년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10여 년에 걸쳐 이어진 주체사상과 종교 사이의 대화, 그리고 평양에 봉수교회와 장충성당이 건립되는 등 1988년을 고비로 급격한 변화를 나타낸 북한 내부 환경의 변화 양상을 반영한 것이다.
주체사상과 종교와의 대화 출발점은 1981년 11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개최된 제1회 ‘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 기독자 간 대화’ 모임이다. 이 모임에서 조선기독교도연맹 서기장 고기준 목사는 “사회주의와 기독교”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주체사상이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인간 사랑의 이념’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이를 북의 공산주의자들과 기독교인이 공통으로 가진 이념적 기초로 설명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주체사상과 종교와의 관계 해명에 나선 인물은 황장엽의 사상적 맥락을 대변한 박승덕 사회과학원 주체사상연구소장이다. 황장엽의 사위이기도 한 박승덕은 1988년 7월 헬싱키에서 개최된 학술심포지엄에서 “주체사상의 원리”에 대해 발표한 이후 1990년 1월 헬싱키에서 개최된 제9회 ‘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 간 대화’ 모임(1982년 이후의 대화부터는 명칭에서 ‘기독자 간’이 빠졌다.–편집자 주)에서 “기독교에 대하는 주체사상의 새로운 관점”을 발표하는 등 활발한 움직임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는 1990년 8월에 베이징에서 개최된 북미주기독학자회 제24차 연례대회에서도 동일한 논문을 발표했는데, 고기준 목사와는 달리 주체사상가로서 보다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주체사상과 종교와의 관계를 설명했다.4
박승덕은 1991년 5월 뉴욕에서 개최된 북미주기독학자회 제25차 연례대회에서 “주체사상의 종교관”을 발표하면서 “주체사상은 맑스-레닌주의와 구별되는 새로운 종교관을 밝혀주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맑스주의 종교관의 력사적 제한성은 주체사상에 의하여 극복되었다.”라고까지 주장했다.5 특히 그는 “기독교에 대하는 주체사상의 새로운 관점”이라는 문서를 발표하면서 김정일이 “주체사상의 기본에 대하여”(1986. 8. 5.)라는 문헌에서 “기독교를 대하는 주체사상의 일관한 관점에 대하여 명철한 해명”을 제시했다고 밝혔고, 김일성이 종교를 악용하는 책동을 배격한 것이지 종교와 종교 신자를 배척한 일이 없다는 사실과 종교에는 나쁜 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점도 있어서 서로 사랑하고 평화롭게 살자는 주장은 주체사상과 상통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불행히도 박승덕의 이런 적극적 활동은 1993년 북핵 위기 발생과 김일성의 사망 이후 중단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1997년 2월 황장엽의 망명으로 박승덕이 숙청된 이후 더 이상 이러한 학술적 대화는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 종교계가 1990년대 말부터 적극적인 대북 인도적 지원활동을 전개하고 2000년 6・15공동선언 이후 본격적인 남북 종교교류에 돌입하지만,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화보다 더 진한 몸과 몸의 부딪침, 즉 직접적인 인적・물적 교류를 통한 호흡의 대화가 공존을 위한 더 실질적인 발걸음인지도 모른다.

주체사상과 종교의 공존을 향하여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6 산하의 종교평화국제사업단(IPCR)이 2009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동북아평화공동체 국제학술회의가 올해로 10주년을 맞이했다. 한·중·일 3개국 종교평화회의가 머리를 맞대고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구축하기 위한 대화를 꾸준히 지속해온 것이다. 필자는 이 회의에 처음부터 거의 빠짐없이 참여해 왔는데, 이번 회의에서 중국 대표들의 태도가 상당히 달라진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동안 한국과 일본 참가자 사이에는 거침없는 대화가 가능했지만, 중국의 경우에는 참가자들이 종교 지도자여도 공식 입장 외에는 굳게 입을 다물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발표뿐 아니라 토론 과정에서도 스스럼없이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는 등 여유 있는 모습이었다. 중국의 종교정책이 달라진 것인지를 확인할 길은 없었지만, 국제회의에서도 여유 있게 대응할 수 있을 만큼 중국 내부의 환경이 변화된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이 부분을 슬쩍 건드리면서 추켜세웠을 때도 그들은 의미 있는 미소로 답했다. 결국 공존은 자신감과 신뢰, 그리고 비전을 공유할 수 있는 전체적인 환경의 변화에 좌우된다는 사실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북한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2012년 9월 말에 평양을 방문한 미국 엘에이(LA) ‘The Light of Glory Church’의 최재영 목사는 당시 북한 주민들이 해외동포나 외부인들에 대해 거의 무장해제 수준으로 경계심과 거리감이 없었다고 밝혔다. 그의 방북기는 「민족21」 2012년 12월호에 게재되었다. 그의 방북기에 따르면 그는 공식일정 외에도 개인적으로 비교적 자유롭게 주민들을 접촉할 수 있었고, 동영상과 사진 촬영 또한 통제받지 않고 자유롭게 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당국자의 사전허락 없이도 일반 불특정 다수의 주민들과 접촉하였으며, 인터뷰 및 대화도 비교적 순조롭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평양역에서 경의선을 이용해 국제열차를 타고 신의주역을 거쳐 압록강 철교를 건너 중국 단둥역으로 출국하면서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북녘의 모습을 영상으로 촬영할 수 있었다.
이처럼 달라진 현실에 대해 그는 이제 북한도 외부와의 관계에서 ‘이제는 자신 있다.’는 자신감을 보여준 것으로 평가했다. 또한 이를 김정은 위원장 시대의 변화로 추측하기도 했다. 북한이 김정은 위원장 체제에서 국제화를 향해 급속히 변모하고 있음을 실감했다는 것이다.
그는 평양에서 대동강변에 산책 나온 주민들에게 교회나 기독교에 대해 알고 있는지 질문도 던져보았다고 한다. 70세쯤 되어 보이는 할머니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모른다고 짧게 대답했고, 그 옆에 함께 있던 젊은 아주머니 역시 ‘교회’라는 단어조차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30분 정도 더 걸어가다가 체조를 하고 있는 아주머니들에게 다가가서 교회에 다녀본 적이 있는지 묻자 “교회에 가는 것보다 운동하는 게 더 좋다.”라고 대답했다. 아마도 이 응답자는 틀림없이 교회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최재영 목사는 옥류관에서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게 된다. 식사를 마치고 옥류관 테라스에 나가 사진을 찍다가 매우 지적으로 보이는 여성에게 말을 걸었다. 그 여성에게 북한의 종교생활에 대해 묻자, 그녀는 북한에도 종교의 자유가 있고, 종교는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지 남이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이 절대 아니라고 대답했다. 주민들이 어떤 종교를 선택하는지 그 추세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는 전체 인민들이 거의 모두 주체사상을 믿는다고 대답했다. 일반 북한 주민들에게는 아직도 교회나 종교가 익숙하지 않고, 주체사상에 대한 믿음이나 마찬가지 정도로 생각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만약 최재영 목사의 체험이 오늘의 북한 사회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면, 주체사상과 종교의 공존은 북한 주민들의 인식 수준을 뜻하는 바로 그 지점부터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선교나 포교를 앞세워 거리를 좁히기 위한 외부의 과도한 접근은 자제될 필요가 있다. 천천히 북한 주민들 스스로가 종교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 공감과 공존의 영역을 넓히고 이를 뒷받침할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천주교가 전래될 때 학구적인 관심이 앞섰고, 개신교 역시 교육과 의료 사업 등 삶의 터전에서 공존의 터를 일구면서 뿌리내린 것처럼, 주체사상과의 공존 역시 ‘그라운드 제로’에서 시작한다는 역사의식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싶다.
물론 북한 지역은 동방의 예루살렘처럼 융성했던 과거가 있다. 그리고 2000년 이후 남쪽 교회의 지원으로 평양 봉수교회가 개축되고, 목회자들 사이의 교류도 빈번했던 것이 사실이다. 평양과학기술대학에는 초빙된 미국 선교사들이 북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2003년 3월 2일에는 ‘3・1민족대회’ 참가차 서울에 온 북쪽 대표단 내의 종교인들이 각각 자신의 종교를 찾아 명동대성당과 소망교회, 봉은사와 천도교대교당을 찾기도 했다.
이런 형태의 진전과 남북 종교교류 성과를 외면하거나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 체제의 속성이나 일반 북한 주민들의 의식은 여전히 ‘그라운드 제로’에 가깝다는 점을 염두에 두는 신중함을 말함이다. 아직 북한 사회에서 종교는 주민들에게 별로 매력적이지도 않고, 실제로 영양가가 없으며 오히려 거추장스럽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그런 삶의 모습이 현재 북한 주민들에게는 자연스럽다. 그 자연스러움을 존중하면서 김정은 시대와 함께하는 새로운 남북 평화공존 시대가 가져올 자신 있는 변화의 물결을 기다리는 것이 순서이다. 그 변화의 물결에 온몸을 맡기면서 ‘주체사상과 종교의 공존’ 드라마를 새롭게 그려본다.


1 찰스 암스트롱은 대구에서 태어나 예일대학교에서 중국학을 전공한 후,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와 시카고대학교에서 역사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1996년부터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강의했으며, 현재 석좌교수이다. 컬럼비아대학교 한국학연구센터를 맡고 있는 그는 2006년에 『북조선 탄생』(The North Korean Revolution, 1945-1950)을 발간했다. 특히 2013년에 발간한 『약자의 폭정: 북한과 세계, 1950-1992』(Tyranny of the Weak: North Korea and the World, 1950-1992)는 2014년에 존 페어뱅크 상을 수상했다.
2 황장엽,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서울: 한울, 1999), 156.
3 『김일성저작집』 27권(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84), 390-391.
4 변진흥, “북한의 종교정책 변화에 관한 연구-인간중심철학의 대두를 중심으로”(한양대 박사학위 논문, 2002), 66-67.
5 북미주기독학자회 엮음, 『기독교와 주체사상: 조국 통일을 위한 남북 해외 기독인과 주체사상가의 대화(북미주기독자회 1989-1992 연례대회 자료집)』(서울: 신앙과 지성사, 1993), 182-194.
6 한국종교인평화회의(Korean Conference of Religions for Peace)는 현재 7개 종단이 공식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개신교, 불교, 원불교, 유교, 천도교, 천주교, 한국민족종교협의회)


변진흥 | 가톨릭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에서 북한학을 전공하였으며, 한양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호남대 교수와 인천가톨릭대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1995년부터 한국종교인평화회의 사무총장으로 남북종교교류 실무를 담당하였다. 현재 천주교 의정부교구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연구위원장을 맡고 있다.

 
 
 

2018년 10월호(통권 7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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