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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설교 (2018년 10월호)

 

  강하면서도 약한 것이 사람이다
  욥기 4:1-11

본문

 

1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이르되 2 누가 네게 말하면 네가 싫증을 내겠느냐, 누가 참고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3 보라 전에 네가 여러 사람을 훈계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를 강하게 하였고 4 넘어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거늘 5 이제 이 일이 네게 이르매 네가 힘들어 하고 이 일이 네게 닥치매 네가 놀라는구나 6 네 경외함이 네 자랑이 아니냐 네 소망이 네 온전한 길이 아니냐 7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8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9 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의 콧김에 사라지느니라 10 사자의 우는 소리와 젊은 사자의 소리가 그치고 어린 사자의 이가 부러지며 11 사자는 사냥한 것이 없어 죽어 가고 암사자의 새끼는 흩어지느니라(욥 4:1-11)



주제 해설
욥기 4-37장은 욥과 엘리바스, 빌닷, 소발, 그리고 엘리후가 나눈 대화이다. 이는 욥기 전체 42장 가운데 가장 많은 분량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온전함, 이것은 욥의 가장 큰 강점이다. 재산, 자녀, 건강, 사회적인 관계가 끊어진 뒤에도 이것은 그를 지켜주는 마지막 보루로 작용한다. 만일 이것이 무너진다면 욥 전체가 넘어질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아내의 말은 욥의 가장 핵심적인 고리를 건드렸다. 게다가 인과응보 사상에 따라 욥에게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라는 친구들의 말은 욥의 경건한 신앙을 다시 한 번 시험대 위에 올려놓았다.

본문 살피기
욥을 찾아온 세 친구 가운데 엘리바스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는 데만 사람인데, 아마 에돔 사람인 것 같다. 그 이름이 에서 및 에돔과 연결된다.(창 36:11, 15, 대상 1:36 참조) 욥이 탄식하며 자기 자신이 아직 살아 있음을 원망한 다음 엘리바스가 입을 열었다. 그의 말은 ‘여는 말(4:2)–훈계(4:3-6)–인간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섭리(4:7-11)–하나님의 계시(진리의 계시, 4:12-21)–인간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5:1-16)–훈계(5:17-26)–닫는 말(5:27)’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는 매우 조심스럽고 정중하게 말문을 열었다. 2절 상반절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먼저 의문사로 시작하는 2aα를 조건문으로 보아 ‘만일 어떤 사람이 (감히) 너를 시험하려 말한다면 너는 지치겠지?’라고 해석할 수 있다. 또한 2aβ를 관계절로 보아 ‘지쳐있는 사람아, 네게 사람이 말할 수 있겠느냐?’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그는 말했다. ‘그러나 누가 (하고 싶은) 말들에서 참을 수 있겠느냐?’(2b 직역) 아마 그는 자기의 생명과 인생을 저주하는 욥의 말을 듣고 말이 하고 싶어 참을 수 없었던 것 같다. 회개하는 대신 자신의 고통만 절절하게 외치는 욥에게 크게 실망한 듯하다.
여기에는 이중의 연약함이 엿보인다. 한마디 말도 듣고 있기 힘든 욥의 연약함과 하고 싶은 말을 도저히 참지 못하는 엘리바스의 연약함이 그것이다. 예레미야는 말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 여기에 쓰인 세 동사[rc[(‘아챠르’, 물러서다), hal(‘라아’의 니팔형, 할 수 없다), lky(‘야콜’, 할 수 있다)]를 엘리바스도 그대로 갖다 썼다.
그는 욥의 네 가지 모습을 칭찬했다.(3-4절) 이 부분은 주목하게 하는 말 ‘보라’로 시작되었다. 첫째, 욥은 약하고 흔들리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지를 알고 그들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둘째, 그는 손에 힘이 빠진 이들(육체적으로 지치고 정신적으로 의욕을 상실한 사람들)을 강하게 해주었다. 셋째, 넘어진 자들을 말로 일으켜 세웠다. 넷째, 굽혀진 무릎을 튼튼하게 했다.
여기에서 약해진 손이나 무릎이라는 말은 용기를 잃거나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을 가리킨다.(시 109:24, 사 35:3-4 참조) 그는 이 칭찬들을 종합하여 이렇게 말했다. ‘너의 경외심이 네 신실함이 아니냐? 네 희망이 아니냐? 그리고 네 길들이 온전하지 않았느냐?’(6절 직역)
엘리바스의 말은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욥 1:3)라는 말씀을 그대로 뒷받침한다. 욥기 1-2장과 4장 3-4, 6절을 함께 읽으면 욥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물론 대인관계나 사회적인 관계에서도 옹근 사람이었다.(욥 29:11-17 참조)
5절에는 욥의 약한 면모가 드러난다. ‘이제 그것이 네게 왔구나. 그리고 너는 힘들어하는구나. 그것이 네 가까이서 너를 건드리는구나. 그리고 네가 무서워하는구나.’(직역) 2절에서 쓰인 지치다는 말이 여기에도 등장한다. 건드리다(치다)는 뜻의 단어 ‘나가’([gn)는 욥기 1장 11절, 2장 5절에도 쓰였다. 사탄은 이 말을 사용하며 하나님께 욥을 치라고 하였다. 무서워하다(놀라다)는 뜻의 단어 ‘바할’(lhb)은 두려움에 떠는 모습을 나타낸다.(욥 21:6, 22:10)
5절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먼저 ‘나약함에 대한 비난’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욥은 평소에 의연하고 경건해 보였으나, 정작 자신이 환난을 당하자 자신이 격려하고 위로했던 그 사람들 곧 불행 앞에 낙담하고 신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던 사람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중이 제 머리 깍지 못한다.”라는 속담이 바로 이런 상황을 나타내는 격언이다.(눅 4:23, 23:35 참조) 또한 이 구절은 ‘격려와 위로’로 해석할 수도 있다. 지난날 시련을 겪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교훈했듯이 이제는 훌륭한 그 행실 그대로 욥 자신에게 적용하여 현재의 고난을 딛고 일어서라는 것이다.
엘리바스가 진정 하고 싶은 말은 7-9절에 있다. ‘자 이제 생각해 보아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냐? 그리고 올바른 자가 어디서 패망했느냐?’(7절 직역) 하나님은 욥의 온전함을 이미 인정하셨다. 사탄은 이 견해에 이의를 제기했다. 엘리바스는 지금 사탄과 비슷한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친구가 적대자로 변하는 것을 암시하는 것일까? 욥기 2장 11절에 등장했던 친구(‘레아’, [;r)는 욥기 4-37장에서 악한(‘라아’, [r;, h['r) 역할을 했다.
‘내가 보았던 대로 말하자면 악한 밭갈이를 하는 자들과 고통을 심는 자는 그것을 거두더라.’(8절 직역) 이와 비슷한 내용이 잠언(3:29, 6:14)과 호세아서(10:13)에도 나온다. 사도 바울도 이 말씀을 그대로 받았다.(갈 6:7-8)
‘카라쉬’(vrx)는 고대 근동 여러 언어에서 ‘씨뿌리다, 쟁기질하다, 밭을 갈다, (땅이나 굴을) 파다, 농사짓다’는 뜻으로 널리 쓰였다. 이 말은 여기에서 비유적・도덕적인 의미로 쓰였다. 그 말맛은 ‘준비하다, 계획하다’에 가깝다. 또한 ‘아붼’(!w이다.
‘하나님께서 숨 한 번 내쉬면 그들은 망하더라. 그리고 그들은 그분의 코의 바람으로 인하여 끝장나더라.’(9절 직역) 욥의 자녀들은 거센 바람(‘루앗흐 그돌라’, hl'AdG> x:Wr)이 칠 때 집이 무너지며 죽었다.(욥 1:19) 욥도 이제 하나님의 숨결(‘느샤마’, hm'v'n>)과 콧바람(‘루앗흐 아포’, APa; x;Wr)에 쓰러지고 말 것인가?
7-9절에 따르면 욥에게 닥친 시련은 사람들에게는 알려지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아시는 그의 죄악에 대한 심판이다. 곧 그 사람의 행위가 그 사람이 받을 화 또는 복을 좌우한다는 말이다.
흔히 말하는 인과응보 사상에 따른 권선징악은 타당한 측면이 있다.(롬 6:23, 갈 6:7-8 참조) 그러나 이것을 상황과 현실을 무시한 채 무조건적인 사실로 받아들이면 교조주의에 빠질 염려가 있다. 또한 누군가를 매도하는 도구로 전락할 수도 있다. 성서는 악인이 잘나갈 수도 있다는 점을 여러 차례 알려준다.(시 73:3, 잠 24:1, 19)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인은 하나도 없다는 말씀에 집착한다면 우리는 죄에도 정도 차이가 있음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게 된다. 더 나아가 같은 죄를 지었더라도 유독 심하게 벌을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10절에는 사자의 비유가 나온다. 여기에는 사자를 가리키는 낱말이 여러 개 있다. 사자를 가리킬 때 가장 널리 쓰이는 ‘아르예’(hyEr>a) 또는 ‘아리’(yrIa), 새끼 사자를 일컫는 ‘샤칼’(lx;v;), 또 젊은 사자를 뜻하는 ‘크피르’(rypiK), 숫사자나 늙은 사자를 의미하는 ‘라이쉬’(vyIl), 암사자 ‘라비’(aybil)가 그것이다. 이 외에도 ‘고르/구르’(rAG)까지 여섯 개 있다. 그것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자를 가리키는지 엄밀하게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자 비유는 지혜문학에 자주 쓰였다.(시 17:12, 잠 28:15) 성서에서 사자는 동물 중 가장 강한 존재이다. 사자는 주로 약탈하고 잡아먹는 역할로 등장한다.(10절) 사자에게 붙잡힌 자는 반드시 슬픔을 당하고, 죄 없는 사람을 대적하려는 계획은 반드시 좌절되리라고 했다.(11절) 늙은 사자가 움킨 것(먹을 것) 없이 죽는 것처럼 욥도 그러하며, 암사자의 새끼들이 흩어지듯이(보호받지 못하듯이) 욥의 자녀도 그렇게 되었다고 엘리바스는 말했다. 사람의 세력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면 다 허무하게 사라진다는 것이다. 만일 사자에 관한 여러 용어가 사자의 가정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이는 욥의 가족이 망가진 것을 빗댄 것이리라.

설교 착상
1) 레토릭은 참 훌륭했다
엘리바스는 우선 병약한 욥의 상태를 배려하며 말을 시작했다.(2절) 그는 욥을 크게 칭찬했다.(2-3, 6절) 그다음에 인과응보 사상을 꺼내들었다.(7-9절) 일단 칭찬을 먼저 한 다음 자기 본심을 이야기하는 것은 수사법으로 볼 때 매우 탁월하다. 여기서 그가 쓴 용어들은 하나같이 다소 섬짓하다.(망하다, 끊어지다, 악을 밭 갈다, 독을 뿌리다, 멸망하다, 사라지다)
물론 그가 말하는 인과응보가 아예 터무니없는 말은 아니다. 그 나름 일리가 있을뿐더러 선을 권장하고 악을 멀리하게 하는 등 인생을 위한 유익한 교훈이기도 하다. 다만 엘리바스는 인생에 대한 심판은 최후에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이 사실을 망각하는 순간 사람은 그 신념을 기계적으로 받아들인다.
세상을 사는 동안 우리 인생에는 여러 차례 기복이 있기 마련이다. 잠깐 흥할 때에도, 잠시 잠깐 망할 때에도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는 통찰력으로 하나님 안에 머무는 것이 중요하다. 인생의 마지막 날은 아직 남아 있으며, 하나님께서 하실 최후의 심판도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런 뜻에서 엘리바스의 탁월한 레토릭이 신앙적으로 바른 내용을 담아내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

2) 강하면서도 약한 것이 사람이다
엘리바스는 욥의 강하고(3-4, 6절) 약한(5절) 모습을 말했다. 그의 강한 면모는 그가 약한 이들을 많이 가르치며 돕는 지혜로운 활동에서 나타난다. 그의 약한 측면은 자신에게 불어닥친 환난에서 드러났다. 그는 이전에는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고 위로했지만 정작 자기 자신에게는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다.
욥은 자기 희망을 죽음에서 찾았다.(6:8 참조) 비록 그가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것을 추호도 염두에 두지 않았더라도 그는 태어나지 않았기를(3:1-10), 태어나자마자 죽었기를(3:11-19), 하루라도 빨리 죽을 수 있기를(3:20-26) 원했다. 살 희망이 그에게 없었다.(7:6 참조)
엘리바스는 그런 욥에게 환난이 닥치기 전에 그가 지녔던 희망을 이야기했다.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경건하게 살아왔다. 인생의 소망을 이 땅에 두는 대신에 하나님께 두며 살아왔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엘리바스는 형통할 때의 욥의 모습이 지금 환난을 극심하게 겪는 동안에도 발휘되기를 원했다.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며 도와주던 그의 모습이 남에게만이 아니라 그 자신에게 적용되기를 원
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욥기 3장이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다행스럽게도 욥기는 3장으로 끝나지 않았다. 4-37장의 치열한 논쟁, 38-41장에서 하나님과 욥의 만남, 42장에서 욥의 고백과 하나님의 회복시키시는 은혜가 계속 이어진다. 이로써 욥이 겪었던 병고와 환난은 그를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서게 만드는 도구가 되었다.
『그리스인 조르바』와 『영혼의 자서전』 등으로 널리 알려진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있다. 그는 39살 때(1922년) 얼굴 전체에 습진이 퍼졌다. 피부과, 내과, 정신과 전문의도 그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때 그를 관찰하던 심리학 교수 빌헬름 쉬테켈(W. Stekel)이 그가 앓고 있는 질병을 ‘성자의 병’(성자가 되기 위한 병)이라 불렀다. 이 말을 욥에게 적용한다면, 욥이 겪는 환난과 질병은 그를 성자로 만드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으리라.

3) 공격하는 자도 인정하는 진실
엘리바스는 평소 욥이 선하게 살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이것을 그는 ‘보라’라는 표현으로 강조했다.(3-4절) 그에 따르면 욥은 많은 사람을 바른 길로 인도했다. ‘훈계하다’는 말은 사람에게 바른 길을 가르쳐주는 것(신 4:36), 회초리를 들거나 벌을 주어 그릇된 행위를 바로잡는 것(레 26:18) 등을 가리킨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손이 늘어진 자를 강하게 해주었다. 손이 늘어진 자 곧 죄악이나 낙담 등으로 인하여 실패한 사람, 힘을 잃고 주저앉아 있는 사람에게 힘을 불어넣어 꿋꿋하게 다시 세워주었다는 말이다. 둘째, 욥은 넘어지는 자를 말로 붙들어주었다. 넘어지는 자란 흔히 전쟁이나 재난으로 인하여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사람을 가리킨다.(레 26:37, 시 9:3) 이는 인생 여정에서 여러 차례 실패하고 지쳐 있는 사람을 비유한 것이다.(시 64:8-9) 욥은 정신적·육체적으로 희망을 잃고 상심해 있는 사람들을 곁에서 따뜻한 말로 붙들어주며 일어설 수 있게 해주었다. 셋째,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해주었다. 무릎이 약하다는 말은 힘이 없어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것을 뜻한다. 의지와 의욕을 상실한 모습이다. 성서에는 약한 무릎(시 109:24), 떨리는 무릎(사 35:3), 물과 같은 무릎(겔 7:17) 등의 표현이 있다. 욥은 이런 사람들을 도우며 격려하여 힘차게 세워주었다.
적대적인 자들마저도 욥이 옹근 사람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는 사람, 재기할 길을 열어주는 사람, 제자리를 찾게 돕는 사람,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욥은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살았다. 이런 사람이 여호와의 종이다.

정현진 | 독일 마인츠대학교에서 구약성서신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다윗도 사무엘도 몰랐다』, 『표적이 전하는 소리를 듣는가』, 『마틴 루터의 시간을 거닐기』 등을 저술했다. 현재 수도교회 담임목사, 한신대 외래교수로 활동 중이다.

 
 
 

2018년 10월호(통권 7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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