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 대한기독교서회 | 회원가입 | 로그인
사이트 내 전체검색

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신학·목회 > [문화와 신학] 애국가 작사자 안창호와 윤치호 09
문화·신학·목회 (2019년 6월호)

 

  <무궁화가>와 <애국가>를 닮은 윤치호와 안창호의 역사적 계승과 혁신
  

본문

 

윤치호는 <무궁화가>를 지었던 독립협회 시절의 주인공이고, 안창호는 <애국가>를 지었던 신민회, 대성학교 시절의 주인공이다. 윤치호의 생애에서 <무궁화가>를 지었던 독립협회 시절은 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 민중(민족)에 대한 신뢰가 가장 컸을 때였다. 그러나 현행 <애국가>가 지어질 때에는 그러한 마음이 윤치호에게서 매우 약해졌거나 사라졌을 때였다. 이에 반해 안창호의 생애에서 <애국가>가 지어진 1907년 무렵은 독립에 대한 열망과 민중에 대한 신뢰가 가장 절박하고 간절했을 때였다. 윤치호와 안창호의 이런 차이는 1905년 을사늑약을 받아들이는 상반된 태도에서 쉽게 확인된다. 윤치호는 을사늑약을 역사의 필연과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체념하고 순응했지만, 안창호는 심장을 토하고 피를 말려서라도 맞서 싸워서 극복하고 청산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다.
안창호는 독립협회를 계승하고 심화, 발전시킴으로써 신민회와 대성학교를 통해 교육독립운동을 이끌었다. <무궁화가>와 <애국가>가 서로 깊이 연결되고 얽혀 있듯이, 윤치호와 안창호는 역사적・인간적으로 깊이 연결되고 얽혀 있었다. <애국가>가 <무궁화가>를 계승하면서 내용과 정신에서 새롭고 혁신적인 모습을 보이듯이, 안창호는 윤치호의 사상과 정신을 역사적으로 계승하면서도 삶과 사상에서 새롭고 혁신적인 정신과 철학을 확립했다.

| <애국가>의 그루터기가 된 <무궁화가>: 뱁새의 둥지에서 봉황이 날아오르다
윤치호가 <무궁화가>를 지은 시기는 1896년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에서 애국가 만들기 운동을 벌였던 무렵으로 보인다. <애국가>는 윤치호가 지은 <무궁화가>와 후렴이 같을 뿐 아니라 1-4절 가사의 글자 수와 운율이 같고, 곡조(올드랭 사인)도 같다. 한마디로 <애국가>는 <무궁화가>의 가사를 저본(底本)으로 글자 수를 맞추어 새로 지은 것이다. 1907년 이전까지 <무궁화가>는 문학적 완성도나 내용에서 가장 뛰어난 애국가였다.
그러나 <애국가>와 비교해볼 때 <무궁화가>의 한계는 뚜렷하다. <무궁화가>는 황제에게 충성하고 국가를 사랑하라는 충군애국(忠君愛國)의 도덕적 권면을 담고 있다. “사농공상 귀천 없이” 신민으로서 저마다 맡은 직분을 열심히 하라는 <무궁화가>의 권면은 민중의 충성과 복종을 강조할 뿐 작사자와 부르는 이의 다짐과 결의가 없고, 국민을 독립과 통일의 주체로 깨워 일으키는 간절하고 사무친 심정과 염원 또한 담겨 있지 않다. 그리고 여기에는 국가와 민족을 위협하는 외적 환경과 상황의 변화와 도전에 대한 어떤 시사도 없으며, 새 시대, 새 역사를 향한 전망과 비전도 느껴지지 않는다. <무궁화가>는 아름답고 품격 있는 문학적 표현과 내용을 담고 있지만, 이 노래에서 말하는 국민은 충군애국이라는 도덕적 권면의 대상일 뿐이다. ‘우리 황실’, ‘우리 본국’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주체적 국민과 그 정체성을 나타내지 않고 황실과 제국을 나타낼 뿐이다.
이에 반해 <애국가>는 그 내용과 정서가 사뭇 다르다. <애국가> 1절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은 간절하고 사무치는 나라 사랑을 담고 있다. 땅과 몸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며(身土不二),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는 것은 곧 나의 몸과 마음이 마르고 닳는 것과 같다. 나의 몸과 마음이 마르고 닳아서 없어져도 ‘우리나라’는 영원히 살아 있기를 염원하는 심정이 1절에 담겨 있다. 여기서 ‘나’는 ‘우리나라’ 속에 녹아 둘은 하나가 된다. 즉 내가 곧 나라이고 나라가 곧 내가 된다. <애국가>가 말하는 나라 사랑은 자신과 나라를 완전히 일치시키는 사랑이다. 2절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 이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는 어떠한 환경과 시련에도 변하지 않는 강인한 기개와 기상을 나타낸다. 특히 ‘철갑을 두른 소나무’는 강대한 일제의 침략과 지배에 맞서 싸우는 전투적인 정신과 기개를 드러낸다. 3절에서 구름 없이 높고 깨끗한 ‘가을 하늘’은 어떤 변화와 도전에도 흔들리지 않는 초월적인 뜻과 신념을 나타내고, ‘밝은 달’은 밝고 뚜렷한 ‘우리 가슴 일편단심’의 변함없는 절개를 뜻한다. 4절은 ‘괴로우나 즐거우나’ 한결같이 ‘우리 기상’과 ‘우리 가슴 일편단심’으로 나라를 사랑하자는 주체적인 결의와 다짐을 담고 있다.
<애국가>에는 <무궁화가>에 없는 네 가지가 있다. (1) 애국가를 지은 이와 애국가를 부르는 국민의 절절하고 사무친 심정과 염원, (2) ‘우리 기상’, ‘우리 가슴’으로 나타나는 민중의 주체적 의지와 전투적인 저항 정신, (3) 외적 환경과 상황의 변화와 도전에 흔들리지 않는 초월적 신념과 높은 절개, (4) 어떤 처지와 경우에도 한결같이 나라를 사랑하자는 결의와 다짐.
이렇듯 <애국가>는 <무궁화가>와 형식적으로 거의 일치하지만, 그 정신과 의지가 너무 다르므로 같은 사람이 지었다고 보기 어렵다. 다시 말해 <애국가>는 <무궁화가>의 본체(hardware)는 그대로 두고 가사의 내용(software)만 고친 것이지만, 그 질적 성격과 지향은 확연히 달라졌다. 겉은 비슷하지만 속은 질적 혁신과 창조적 변화를 겪었다고 말할 수 있으며, 내용의 질적 변화뿐만 아니라 마음을 움직이는 감화력에서 결정적이고 큰 차이를 보인다. <무궁화가>에서 <애국가>로 탈바꿈한 것은 낡고 평범한 정신을 담은 노래에서 민족을 살리고 깨워 일으켜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통일을 이루는 위대한 정신의 노래가 태어난 것이며, 비유로 말하자면 뱁새의 둥지에서 봉황이 날아오른 일이었다. 따라서 <무궁화가>의 작사자와는 다른 사람이 그 노래를 저본으로 하여 1-4절의 가사를 새로 지어 <애국가>가 탄생했다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
이처럼 놀라운 창조적 혁신과 변화를 가져온 사람은 누구일까? 그 사람은 윤치호와 역사적으로나 인간적으로 매우 가까울 뿐 아니라 함께 손잡고 일해야 했던 인물일 것이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시절, 신민회와 대성학교, 청년학우회 시절에 역사적・인간적・사업적 등 여러 측면에서 윤치호와 연속성을 가지고 서로 긴밀한 관계를 가진 사람은 안창호 한 사람뿐이다. 안창호는 애국독립운동과 국민교육운동을 위해서 윤치호가 꼭 필요했다. 독립협회와 신민회의 역사적 계승과 혁신을 이루기 위해서도 안창호는 윤치호를 만나야 했고 윤치호를 이어서 민족역사의 과제와 사명을 완수해야 했다.

| 윤치호에게 없는 것과 안창호에게 있는 것: <애국가>의 정신과 신념
윤치호와 안창호는 서로 가깝고 친밀했으며, 사상적 공통점과 유사성이 많았다. 하지만 훗날 윤치호는 친일파의 거두로 여겨지며, 안창호는 애국독립운동의 사표로 추앙되는 등 두 사람이 걸어간 길은 상반되고 너무나 대조적이다. 둘 사이에 공통점도 많고 함께 일하기도 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극명하게 서로 다른 인생을 살게 되었을까?
기본적으로 <무궁화가>와 <애국가>의 정신과 사상의 차이점이 윤치호와 안창호의 이런 차이를 가져왔다. 첫째,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절절하고 사무친 심정과 염원을 가졌는가? 둘째, 어떤 환경과 도전에도 흔들리지 않는 ‘철갑을 두른 소나무’처럼 강인한 의지와 투쟁정신을 품었는가? 셋째, 한국 민족(민중)을 ‘철갑을 두른 소나무’ 같은 ‘우리 기상’과 ‘가을 하늘, 밝은 달’ 같은 ‘우리 가슴’의 일편단심을 가진 주체로 보았는가? 넷째, 어떤 처지와 경우에도 ‘괴로우나 즐거우나’ 한결같이 나라를 사랑하는 결의와 다짐을 가졌는가? <무궁화가>에는 없고 <애국가>에는 있는 이 네 가지의 유무에 따라서 두 사람의 인생과 역사는 상반되고 대립된 길을 가게 되었다.
윤치호에게는 <애국가>의 이런 정신을 찾아보기 어렵다. 먼저 윤치호는 문명개화를 이룩한 일본의 강대한 힘을 숭배하고 찬양하면서 낙후된 조선과 조선 역사에 대해서 체념하고 절망하였다. 민중을 불신하고 멸시한 윤치호는 강대국 일본에게 점령당하고 지배당하는 약소국의 운명에 순응하고 체념하면서 일제가 지배하는 현실에 안주하였다.
윤치호의 일기와 안창호의 일기를 비교하면 두 사람의 극명한 차이를 알 수 있다. 윤치호는 자신의 일기에서 “내 나라 지체가 너무 더러우니 타국 사람에게 부끄럽기 한량없다.”(1988년 6월 2일), “내 나라 자랑할 일은 하나도 없고 다만 흠 잡힐 일만 많으며 일변 한심하며 일변 일본이 부러워 못 견디겠도다.”(1888년 12월 29일), “지금까지 여러 상황을 보건대 나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는 것보다 영국의 지배를 받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한다.”(1890년 5월 18일)라고 했다. 또한 1905년 11월 17일에 이루어진 을사늑약에 대해 쓴 일기는 그의 심정과 신념을 보여준다. “조선의 독립은 오늘 오전 4시 혹은 2시경에 조용히 사라져 버렸다. …아직도 희망하는 것은 어리석지만 나는 일본의 거창한 발표와 지루한 약속이 아니고 명백한 행동과 실례로서 조선인의 이익을 보호할 것을 희망한다.”
윤치호의 일기에서 분명하고 일관성 있게 나타나는 사실은 불의하고 거대한 군사력과 자본력에 맞서 목숨을 걸고 끝까지 싸울 ‘철갑을 두른 소나무’ 같은 의지와 기개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가을 하늘의 높은 기상과 밝은 달 같은 뚜렷하고 확고한 신념과 일편단심의 절개가 없었다. 민중과 더불어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를 사랑하려는 다짐과 결의도 보이지 않는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심장을 토하고 피를 말려서라도 나라를 사랑하고 지키려는 사무친 심정이 윤치호에게는 없었다.
안창호에게는 <애국가>에 담긴 그 네 가지가 있었다. 첫째, 주권을 잃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1906년 말에 쓴 ‘대한신민회 취지서’에서 ‘심(心)을 토하고 피를 말려서’ 할 일은 ‘유신’이며(維新) 유신의 중심은 ‘민을 새롭게 함’(新民)에 있음을 설파하였다. 안창호는 민을 나라의 주인과 주체로 보고 민과 나라를 일치시켰으며 민을 새롭게 함이 곧 나라를 새롭게 하고 구하는 길임을 말했다.1 그리고 이를 위해 심장을 토하고 피를 말리는 헌신과 결의를 다짐하였다. 이것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우리나라 만세’를 기원하는 염원과 일치한다.
둘째, 일제의 강대한 힘에 굴복하지 않고 맞서 싸우자는 저항과 투쟁의 강인한 의지를 드러냈다. <애국가>를 작사할 무렵인 1907년 5월 12일의 ‘삼선평 연설’에서 안창호는 국가를 유기체적인 한 몸(생명체)으로 보고 국가를 사랑하는 것(愛國)이 곧 ‘나의 몸을 사랑하는 것’(愛身)이라고 하여 국가와 국민(나)을 일치시켰다. 또한 일제에 대한 독립전쟁을 준비하고 곧 전쟁을 선언하자고 주장하였다.2 이러한 안창호의 기개와 기상은 2절에 나오는, 바람과 이슬에 변하지 않는 ‘철갑을 두른 소나무’의 전투적인 기개와 기상을 닮은 것이다. 이것은 안창호와 한국 민족이 함께 지닌 ‘우리 기상’이다.
셋째, 안창호는 ‘가을 하늘’, ‘밝은 달’ 같은 높은 신념과 뜻을 민중 속에서 민중과 함께 실현하며 살았다. 그는 쾌재정의 연설에서 민을 주체로 깨워 일으키며 민과 하나 되는 체험을 한 이래 민중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일어서는 민중교육훈련 조직운동에 헌신하였다. 1906년 공립협회 1주년 기념강연에서 그가 공립협회의 강령인 민이 서로 ‘보호하고 단합함’이 문명부강의 뿌리와 씨라고 했을 때 민이 문명과 국가의 중심과 주체임을 확신하고 밝힌 것이다.3 안창호는 명예욕이나 권력욕에 휘둘리지 않았다. 그는 어떤 유혹이나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는 푸른 솔의 강인한 기상, 가을 하늘과 밝은 달처럼 높고 뚜렷한 신념과 뜻을 가지고 민중 속으로 들어가서 평생 민중과 함께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위한 길을 줄곧 걸어갔다.
넷째, 안창호는 어떤 시련과 곤경에도 ‘괴로우나 즐거우나’ 한결같이 나라를 사랑하는 길로 나아가자는 결의와 다짐을 가지고 살았다. 임시정부 시절에 쓴 안창호의 일기는 그의 이런 결의와 다짐을 여실히 보여준다.4 이 시기에 있었던 적십자사 간호대 개교식에서의 연설은 이러한 그의 심정과 자세를 잘 드러낸다.

동지 사이에 당하는 참상과 사업진행의 곤란한 관계로 불유쾌한 감정을 금하기 어려우나 우리 앞길에 성공할 것을 희망하면 족히 위로가 될 것이다. 우리가 성공할 희망이 확연한 것은 유진무퇴하면 승리를 득하는 것은 고금에 바뀌지 않는 이치라. 그런데 우리 민족의 과거와 현재를 말하면 만사가 무에서 유로 나아가고 소에서 대로 이른 것은 명확한 사실이오, 현상이다. 과거와 현재는 유진무퇴하였으므로 미래에도 과거와 현재같이 멈추지 않고 나아가면 승리를 기약할 수 있으니 공연히 불유쾌한 감정으로 흥분을 죽여 비관을 짓지 말며 유쾌하고 용감한 기상으로 만난이 당도해도 직진하여야 하겠다.5

안창호의 일기에서 그는 어떠한 곤경과 난관, 실패와 괴로움이 있더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조금도 물러섬 없이 앞으로 나아가자고 끊임없이 역설하고 다짐하였다. 그는 <애국가>의 정신과 기상, 절개와 신념을 가지고 살았던 것이다. 윤치호가 한국 민족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서 아무런 희망을 보지 못한 채 절망하고 체념한 것과는 달리 안창호는 한국 민족에게서 희망을 보고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갔다.
<애국가>가 지어진 1907년 전후의 시기에 안창호와 윤치호는 이미 상반된 시국관을 가지고 있었다. 윤치호는 을사늑약을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역사의 필연과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일제의 통치 아래에서 국민계몽과 교육을 계속하려고 했다. 그는 본디 조국의 독립보다 문명개화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1880년대 후반부터, 그리고 을사늑약 이후에는 더욱이 윤치호는 조선이 자주독립과 자강개혁을 이룰 수 있으면 좋겠지만, 여의치 않으면 문명한 강대국의 보호와 도움 아래에서 문명개화의 길을 걷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에 반해 안창호는 을사늑약이 이루어진 후 나라의 주권과 독립을 잃었다고 보고 깊은 슬픔과 고통을 느꼈다. 1906년 말경에 미국에서 작성한 ‘대한신민회 취지서’에 보면 그가 얼마나 깊은 격정에 휩싸였는지 알 수 있다. 그는 ‘목숨을 바치고 피를 말려서라도’ 일본의 손아귀에서 조국을 구해야 한다는 절박하고 사무친 심정을 드러냈다.6 그는 1907년 2월 20일에 귀국할 때 일본과의 독립전쟁을 염두에 두고 국민교육과 전쟁준비를 계획하고 추진하였다. 그리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민중을 깨워 일으켜 나라의 독립과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혀가 닳도록, 몸이 닳고 피가 마르도록 연설하고 <애국가>를 부르며 사람들을 조직하고 끌어 모았다.

| <애국가>를 몸으로 살았던 안창호
윤치호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이끈 뛰어난 지도자였고 최고 지식인 명망가였다. 안창호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통해서 신문명과 민주정신을 배웠고 민족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그가 미국에서의 유학을 중단하고 한인 노동자들을 교육하고 조직하여 공립협회를 만든 것이나, 한반도에 돌아와서 독립협회 청소년 회원들을 중심으로 신민회를 만든 것은 역사적으로 독립협회를 계승한 것이었다. 윤치호는 안창호에게 스승이며 선구자였고, 안창호는 윤치호의 제자이며 계승자였다.
윤치호가 강대한 일제의 통치에 굴복하고 민족의 독립과 미래에 대해 절망하고 좌절했다면, 안창호는 윤치호가 포기하고 체념한 그 자리에서 불사조처럼 일어나 민족을 깨워 일으키며 독립과 통일의 길로 나아갔다. 스승 윤치호는 게 걸음을 걸었으나, 제자 안창호는 평생 바르고 곧은 걸음을 걸었다. 선구자 윤치호가 실패하고 패배한 자리, 체념하고 포기한 자리, 타오르던 열정과 신념이 식어서 재가 된 자리에서 불사조처럼 힘차게 솟아올라 앞으로 나아간 안창호는 청출어람(靑出於藍)의 본을 보였다. 윤치호가 체념하고 절망한 한민족의 낡은 과거에서 안창호는 <애국가>의 정신과 신념으로 새 나라의 정신을 일구어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절실하고 사무치게 나라를 사랑하는 정신과 심정이 없었던 윤치호에게는 <애국가> 역시 절실하게 필요하지 않았다. 나라와 자기 몸을 일치시키고 심장을 토하고 피를 말려서라도 나라를 지키고 구하려고 하였던 안창호에게는 <애국가>가 꼭 필요했다. 안창호의 삶과 정신은 민족의 한 사람 한 사람을 나라의 주인과 주체로 깨워 일으켜 나라의 독립과 통일을 이루려는 신념과 의지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이러한 신념과 의지는 <애국가>의 정신과 일치한다. <애국가>의 정신으로 안창호는 식민지 백성이 된 민족의 막힌 길을 열고 일제가 민족 앞에 세운 벽을 무너뜨렸다.


1 주요한 편저, 『安島山全書』(흥사단, 2018), 1070.
2 안창호, “삼선평연설”, 주요한 편저, 위의 책, 586-587.
3 안창호, “공립협회 1주년 기념 연설”, 주요한 편저, 위의 책, 581.
4 주요한 편저, 위의 책, 774, 778.
5 주요한 편저, 위의 책, 799-800.
6 안창호, “‘대한신민회 취지서”, 주요한 편저, 위의 책, 1069-1070.



박재순 |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한신대학교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신학연구소 번역실장,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연구실장, 씨사상연구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씨사상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삼일운동의 정신과 철학』, 『씨사상』, 『함석헌의 철학과 사상』, 『다석 유영모』 등이 있다.

 
 
 

2019년 11월호(통권 731호)

이번호 목차 / 지난호 보기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