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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신학·목회 > [문화와 신학] 중세 사람들의 삶과 죽음 11
문화·신학·목회 (2019년 6월호)

 

  내 영혼의 평안을 위해 기도하라
  

본문

 

앞선 글에서 우리는 삶의 여러 분야를 대하는 중세인들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이번 글에서는 죽음과 영혼을 관리하는 중세 수도원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중세의 수도원은 기도처가 되어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으며, 동시에 물질적인 역할도 함께 감당했다. 여기서 물질적인 역할이라 함은, 잘 알려진 대로 맥주를 만들어 팔거나, 소금장사(당시에는 소금이 금보다 비쌌다!) 등으로 돈벌이를 삼은 것을 말한다.
정신적인 영역에서 수도원의 역할은 그리스도 정신을 전파하며 사람들의 신앙심을 북돋고, 산 자의 영혼은 물론 죽은 자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었다. 천국에 대한 열망이 강했던 중세 귀족들은 살아생전의 참회도 모자라 자기의 영혼을 위하여 빌어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수도원과 수도승들이 이러한 역할을 도맡았던 것이다. 이를 위해 수도원들은 연합하여 기도모임을 만들었는데, 카롤링거 시대(751-987)의 수도원 기도모임이 대표적이다.

| 수도원이여,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신학자 페터 하벨 박사는 카롤링거 시대 수도원 일화를 소개한다. 760년, 다수의 주교들과 수도원 원장들이 프랑스 아티그니에 모여 종교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수도원에 소속된 동료들이 함께 기도나 시편 낭송기도(Psalter: 시편을 1편부터 150편까지 읽으며 기도하는 것, 시편기도)를 드리는 연합을 구성하였는데, 이러한 회의 내용을 공식적인 문서로 만들어두었다.
이 연합체의 주된 목적은 죽은 이들의 영혼을 기억하고, 이들을 위해 100번의 미사와 100번의 시편기도를 바치는 것이었다. 공동번역 성서의 경우 시편은 180여 쪽에 달하는데, 이 방대한 분량의 시편을 100번이나 읽으며 기도하다니! 실로 엄청난 기도가 아닐 수 없다. 그 외에도 주교들과 수도원 원장들은 30번의 미사를 올렸다. 이러한 내용은 다른 지역의 기록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772년 딩골핑 수도원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기도 연합체에는 6명의 주교와 13명의 수도원장이 함께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은 죽은 이의 영혼을 기억하며 100번의 미사와 100번의 시편기도를 의무적으로 행하였다.
8세기 바이센부르크(Weissenburg)의 수도원에서도 유사한 형태의 기도 연합체가 만들어졌다. 또한 724년에 세워지고 2003년에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라이헤나우(Reichenau) 수도원에서도 대규모의 기도 연합체가 생겨났다. 라이헤나우 수도원에서는 주교나 수도원장뿐 아니라 낮은 직급의 수도승과 일반인, 심지어 수도원에서 일하는 농노들도 기도 연합체에 참여했다. 835년에는 50개의 수도원이 이 연합체에 가담하였고, 10세기 말에는 100개가 넘는 공동체로 불어났다. 이 수도원은 각 공동체 회원들의 직위, 헌금, 사망일 등을 매우 자세하고 정확하게 기록하였는데, 자그마치 4만여 명의 이름이 기록되었다. 수도원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각 공동체에 소속된 망자들을 기억하며 기도했다고 전해진다.

- 매해 11월 14일, 망자 회원들을 위해 3번의 미사를 바치라. 또한 시편기도로 그들을 기억하라!
- 첫 달의 시작일에는 위와 동일한 기도를 올리라. 가장 최근에 죽은 이들에게는 예외적으로 봉헌미사와 50번의 시편기도를 바치라!
- 누군가의 사망 소식을 들으면 즉시 3번의 미사를 바치고, 시편기도를 올리라! 사후 7일째 되는 날 다시금 30번의 시편기도를 바치라. 30일째에는 죽은 이를 위한 미사와 50번의 시편기도로 망자를 기억하라!


다음은 프랑크푸르트와 이웃한 도시 풀다의 이야기이다. 이곳의 수도승들은 863년 수도원 내부의 기도 연합체를 결성하였으며, 이 연합체는 모든 수도승이 살아 있는 동료들을 위해 매년 10번의 시편기도를 드리거나, 10번의 미사를 바쳐야 한다고 의무로 규정하였다. ‘10번의 시편기도’와 ‘10번의 미사’로 굳이 구분을 한 이유는 미사를 지낼 권한이 없는 수사들 때문일 것이다. 이 수사들에게는 미사 대신 10번의 시편기도를 권한 것이다. 몸이 아파 정해진 기도시간에 참여하지 못하는 수도승은 매일 5번의 시편기도를 드려야 했다. 동료가 죽으면 수도승들은 30일 이내로 3번의 시편기도와 3번의 미사, 12번의 밤기도, 12번의 저녁기도로 망자의 영혼을 기억하고 도와야 했다. 또한 수도승의 부모나 형제가 죽었다면 이들을 위해 50번의 시편기도를 바치고, 더 나아가 밤기도와 저녁기도의 의무를 다하게 하였다. 세속에 사는 친척들이 죽었을 때에도 그들을 위해 30번의 시편기도를 바치게 하였다.
이러한 이야기로 미루어볼 때, 우리는 중세인들이 사후의 영혼들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한 번의 시편기도를 바치는 것도 버거울 터인데, 수십 번의 시편기도를 바쳤다는 사실이 놀랍다. 또한 이들의 기도 소리가 하늘에 닿아, 죽은 이들의 영혼이 아름답게 구제되었을지도 궁금하다.

| 문지기여, 천국 문을 열어주십시오!
중세시대 유언장에는 자신의 사후, 영혼의 구제를 위해 가난한 자들을 보살피라는 언급이 자주 등장한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자선은 음식과 옷으로 베풀어졌는데, 사람들은 이러한 자선을 행하지 않으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 생각했다고! 이러한 인식 덕택에 가난한 사람들은 ‘천국의 문지기’라는 칭호를 얻을 정도였다고 페터 하벨 박사는 말한다.
12세기 중반 크루니 수도원에는 300명 정도의 수도승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매년 약 1만 명을 위하여 기도를 진행했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수도승들은 가난한 축제일에도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인 고기와 와인을 사람들에게 제공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매일 50명, 그러니까 1년에 약 1만 8,000명에게 음식을 나누어주었다고! 또 다른 수도원에도 한 형제가 죽을 때 남긴 돈으로 30일 동안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제공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처럼 당시 수도승과 부자들은 가난한 이들을 ‘천국의 계단’쯤으로 여긴 것 같다.
귀족과 왕족들은 자신들이 직접 자선을 행하지 않고, 재물로써 자신의 영혼을 구제하는 방편을 마련하였다. 이들은 수도원에 많은 돈을 기부하고 사후 자신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줄 것을 부탁했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언급 역시 빼놓지 않았는데, 자신이 지옥과 연옥에서 시달릴 기간을 줄이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616년 사망한 주교 베트람(Bertram von Le Man)의 유언장에는 고인의 혼을 구하기 위한 헌금이 명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노예들을 자유롭게 풀어주라고도 언급하고 있다. 1054년에 죽은 수녀원장 테오파누(Theophanu)의 유언장은 매우 상세하게 작성되었는데, 우리는 이를 통해 중세인의 천국에 대한 열망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다.

나의 사후 30일 동안 12명의 사제는 나의 영혼을 위한 미사를 올리라. 이에 대한 대가로는 30졸리디(Solidi)를 지불하라! 가난한 이들에게는 5졸리디씩 나누어주고, 그다음 날 다시 2졸리디를 나누어주라. 장례식 날에는 5졸리디를 나누어주고, 그 뒤 4일 동안 매일 2졸리디씩 나누어주라! 어려운 상황에 처한 외국인들에게 5데나레(Denare)를 나누어주라.
수도원이 나의 기일을 기념할 때에는 30번의 미사를 올리라! 이에 대한 대가는 30데나레이다. 3개의 수도원은 각각 30일간 나의 무덤에서 한 번의 시편기도(Psalter)를 올리고, 대가로 3졸리디를 지불하라. 100명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5데나레를 나누어주어라.


이 유언장을 보면, 가난한 자들을 위한 기부금을 한번에 주지 않고 날마다 다른 액수를 책정했음을 알 수 있다. 왜 그렇게 했을까? 가난한 이들이 자신의 장례식장을 떠나지 않게 하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당시의 화폐 가치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대가를 지불할 만큼의 금액을 조달할 수 있다는 것은 그녀가 귀족 출신임을 암시한다. 귀족 출신 수녀원장의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 그 믿음이 너무 철저해 오히려 처절하게만 느껴진다.
지옥과 연옥에 대한 공포는 중세 후기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한 예로, 무역업으로 많은 부를 축적한 오토 바이스(Otto Weiss)는 1427년 사망 당시 유언을 남겼는데, 자신의 집을 팔아 그 값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고, 나머지를 비엔나의 스테판교회에 희사한 뒤 자신의 영혼을 위해 미사를 올려달라는 것이었다. 루트비히 7세는 자신의 장례식 때 매일 1,000명의 가난한 이들을 불러 음식을 대접하라는 유언을 남겼고, 1517년 대부호 푸거(Fugger) 가문에서는 자그마치 1,000굴덴을 아우크스부르크의 카타리나 수도원에 기증했다. 1410년 비엔나에 살았던 한 사람은 사후 자신의 영혼을 위해 성지순례를 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는 성지순례의 장소와 횟수도 정해놓았는데, 로마와 아헨은 각각 한 번, 성모 성지는 다섯 번, 그리고 다른 성지에는 서른 번 가서 자신의 영혼을 위해 빌어달라고 했다.
후손들에게 유언을 남기면 이를 어기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전해지는데, 후손들 역시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고, 조상이 잘되면 자신들이 잘되고, 후손들도 그러하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1482년 빌헬름 3세가 수도원에 남긴 서류가 마그데부르크에 남아 있다. 그의 서류에는 기도 부탁을 받은 수도원이 망자가 요청한 기도와 미사를 지키지 못할 경우, 수도원 원장이 28페니히의 벌금과 이자를 지불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다.
물론 유언장을 떠나서라도, 귀족이 죽으면 온 교구와 수도원에서는 30일간의 기도를 드려야 했으며, 민중 역시 죽은 제후를 위해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했다. 1482년 튀링겐 방백 빌헬름 3세가 죽자 과부가 된 카타리나는 죽은 빌헬름 3세를 위한 30일간의 기도를 민중에게 공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 축제와도 같은 장례식
독일의 사학자 스피스 교수는 중세 귀족들의 장례식이 탄생의 순간과 마찬가지로 축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고 말한다. 이에 관한 다양한 기록이 존재하는데, 1471년 프리드리히 2세는 한 귀족의 장례식에 참여하며 4,500명의 사람과 1,902마리의 말을 동원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 중에는 망자를 위해 기도할 557명의 수도승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 1476년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의 장례식에는 8명의 제후, 17명의 수도원장, 600명의 수도승이 참여했으며, 3,500마리의 말이 동원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실로 엄청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당시에는 가족과 친인척뿐만 아니라 낮선 사람을 고용하여 일당을 주고 장례행렬을 뒤따르도록 시키기도 했다. 고용된 이들은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1509년 바이에른의 알브레히트 4세는 일당을 지불한 일일 고용인 50명에게 검은 옷을 입히고 손에는 촛불을 들게 한 후 장례행렬을 따라가도록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배불리 먹을 수 있고, 공짜 옷도 얻을 수 있었으니 가난한 이들은 장례식 참여를 선호했다.
동양에서 조상의 묏자리를 쓸 때 풍수와 지리를 따져 위치를 정하듯, 서양에서도 조상의 묘가 명당자리에 있기를 바랐다. 서양에서 말하는 명당자리는 바로 교회의 제대 자리였다. 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귀족들은 교회에 많은 돈을 희사하기도 했고, 1,000번의 미사를 바치기도 했다. 특별히 유명한 성인이 이러한 명당자리에 묻힌 경우, 많은 신자들이 모여들어 기도를 하며 돈을 바쳤는데, 이는 신 곁에서 살고 있을 성인을 가장 빠른 기도 전달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서양 교회의 제대 아래에는 지금도 많은 시신이 묻혀 있다고!

| 글을 마치며
중세 유럽의 왕족이나 귀족들은 왜 이리 자신의 사후에 연연했을까? 앞에서 언급한 대로, 자신의 사후에 대해 이렇게 철저하게 관리한 것은 당시의 지옥과 연옥, 그리고 부활 교리 때문이었다. 또한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 약대(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라고 명시한 마태복음 19장 23절 때문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이 성서 구절을 알고 있었지만, 사람이기에 티끌만한 죄도 짓지 않는 삶을 살 수 없었고, 생전의 죄를 본인이 직접 풀고자 노력했지만 그것 또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자신의 사후에 후손들이 자신의 영혼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해주면 자신의 죄가 탕감될 수 있고, 성서에 적힌 대로 언젠가는 천국에 갈 수 있으리라고 여긴 것이다. 조상의 ‘천국행’은 곧 지상에 사는 후손들의 몫이 되어버렸고, 남아 있는 후손들은 교리에 따라 열심히 기도하든, 수도원에 물질을 많이 갖다 바치든 어떤 방법을 쓰든 간에 자기 조상들을 천국으로 인도해야만 했다. 지금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우리는 자신들의 사후에 연연하며 여러 방식으로 속죄하려는 중세인들의 모습을 보았다. 자선, 기도, 성지순례 등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었지만, 결국 천국에 가기 위한 가장 중요한 매체는 ‘돈’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의문이 든다. 오늘날에도 천국과 지옥, 연옥의 교리는 여전히 살아 있는데, 왜 중세인들이 가졌던 간절함은 사라져버렸을까? 사후세계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많아진 것은 분명한데, 사람들의 믿음이 약해진 탓일까? 당시의 그런 교리가 진리였다면, 오늘날에도 그 교리는 진리로서 살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동쪽에서 해가 뜨고 서쪽으로 해가 지는 자연의 이치는 그대로이지만, 종교가 주장하는 진리는 시시때때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인가? 생각해볼 일이다.


양태자 | 독일 마르부르크 필립스대학교에서 비교문화학과 비교종교학 석사학위를, 예나 프리드리히 쉴러대학교에서 비교종교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중세의 뒷골목 풍경』, 『중세의 뒷골목 사랑』, 『중세의 길거리의 문화사』, 『중세의 잔혹사 마녀사냥』 등을 집필하였고, 영성 번역서로 『파도가 바다다』가 있다.

 
 
 

2019년 7월호(통권 7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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