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 대한기독교서회 | 회원가입 | 로그인
사이트 내 전체검색

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와신학 > 성서정담 - 평신도 고전학자의 성서읽기 (3)
문화와신학 (2016년 5월호)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했다
  

본문

 

구별이 차별이 되는 세상
어스름한 저녁에 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를 올려다봤다. 차곡차곡 블록 쌓아놓은 것 같은 집들에 하나둘씩 불이 들어오고 있었다. 알록달록한 색깔이 꼭 모자이크처럼 색다른 멋이 있었다. ‘위아래로 사람들이 많기도 많다.’ 하는 순간, 문득 오랫동안 잊고 있던 말이 귓가에 되살아났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


구호 많은 나라치고 좋은 나라 없지만 이 말만은 귓속에 쏙 들어왔다. 친구 녀석 하나가 킬킬대며, “뭔 소리야, 아파트 보니까 위아래로 사람들이 득실거리는데.”라며 농담했던 것까지 떠올랐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단순한 평등 이상의 뭔가가 들어 있는 좋은 말이지만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잊은 이유는 나조차도 이 말을 신뢰하지 않게 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세상엔 단순한 구별 이상의 차별이 분명 존재하고, 그런 차별을 의도적으로 영속화하려는 움직임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점점 지식이라는 알량한 것을 머릿속에 우겨넣으면서 마음이 받아들였던 가치가 희미해졌던 거였다.
산책에서 돌아오던 그날 저녁, 마음이 더 무거워진 것은 우리 아파트 관리인 아저씨가 내게 인사를 했기 때문이다. 평소 서로 아는 체하는 사이였지만 그날 그 인사는 왠지 내가 관리인 아저씨보다 우월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 같아 마음이 못내 복잡했다. 관리인은 관리인의 일을 한 것뿐이고 난 그런 관리를 받는 집에 사는 것일 따름이다. 그건 단순한 구분이고 차이이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런 구분이 차별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뻔뻔한 낯짝을 치켜들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격이 낮다고 분식집에서는 절대로 식사를 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일반인이 타는 버스나 지하철을 절대로 타지 않는 사람도 있다. 보통 사람과 자신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이 땅에 정말 있다. 물론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사람 위에 사람 없는 것’처럼, ‘사람 아래 사람 없는 것’처럼 살고 있는지는 쉽게 장담하기 어려웠다. 이런저런 지위가 생기고 또 본질이 아닌 부수적인 것들이 이름 앞뒤에 붙다보니 제 주제를 잊고 망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시 이런 식의 고상한 말들로 ‘그래도 나는 이 정도로 나를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라니까.’ 하며 면피용 언사로 호도하는 건 아닐까?
며칠 후, 주일이 되어 교회에 갔는데 전에는 그냥 흘러가던 말이 귀에 들어왔다.
“시어머니에게도 잔소리 안 듣는데 누가 여기 와서 그런 소릴 들어가며 설거지를 해.”
교회 식당에서 밥을 타서 자리에 앉던 집사님 내외의 말씀이었다. 여전도회에서는 순번을 정해 주일날 식사를 담당한다. 하루 전인 토요일부터 음식을 장만해서 주일에 한꺼번에 몰리는 수많은 교인들의 식사를 배식하고 치우자니 일손이 만만치 않게 필요하다. 그런데 젊은 여전도회원들의 경우는 아무래도 새댁들이라 손이 굼뜨고 서투를 수밖에 없는데, 답답한 마음에 일을 맡은 권사님들이 이런저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 젊은 여전도회원들을 힘들게 할 때가 종종 생기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봉사요 헌신이어야 할 일이, 점점 더 ‘자발적이지도’ 그리고 ‘그리 즐겁지도’ 않은 의무와 노역이 되어버렸다. 그냥 빨리 이번 순번이 끝나서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게 되고 이런저런 이유로 참여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그럴수록 일은 더 힘들어진다.
“성가대 시간과 겹쳐서 이번엔 못하겠어요, 죄송해요.”
이렇게 말하며 휙 빠져나간 분이나 남은 분이나 서로 미안함의 부채감을 한껏 어깨에 짊어지고 성가대에 서고 또 설거지를 한다. 퍽이나 은혜가 되겠다. 웃을 일이 아니지만 식당 봉사 때문에 교회를 옮긴다면 말이 되겠는가? 이런 일이 어느 한 교회만의 일이라면 심각할 것이 없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설거지만이 아니다. 주차관리 할 집사님도 부족하고, 본당을 청소하고 화장실을 닦을 교인도 찾아보면 별로 없다.
이 모든 것이 권사님들의 잔소리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그건 완전히 난센스이다. 아무도 인정하지 않지만, 아니 인정하려 들지 않지만, 교회 안에도 더 좋은 일과 덜 좋은 일이 있다. 하는 일로 사람을 평가하려 드는 시선이 여기에도 상존한다.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아래 사람 있기’ 때문이다.

“자, 하나님, 당신의 교회인데 이를 어쩌실 셈입니까?”
“인간 사는 곳에 구별이 없을 수 없지만 그게 차별로 변질되어 가는 것이 교회 안에서도 심각한데, 이를 어쩌실 셈이세요?”
“그냥 돈으로 승부할까요? 궂은일은 다 모아서 돈 주고 외부 용역을 시킬까요?”


며칠 뒤, 성경 구절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가슴이 뜨끔거렸다. 잘 아는 구절이었지만 그날만은 조금 다르게 마음을 흔들었다.
삼갈이라는 사사 이야기였다.

깍두기 삼갈과 시시한 인생
‘사사’라는 것은 여호수아가 죽은 후부터 이스라엘에 왕이 세워지기 전까지의 시기 동안 백성들을 이끌던 재판관이자 군대 장관 노릇을 하던 지도자를 이르는 말이다.
여호수아의 영도로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 백성들이 지파별로 나뉘어 살았는데, 여호수아가 죽자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잊고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며”(삿 21:25) 살았다. 그건 자연스레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이방신 숭배나 옳지 않은 삶의 방식이었고, 그로 인해 주변 이민족의 침탈과 압제를 받게 되었다. 그렇게 허덕이던 백성들이 괴로워 울부짖으면 하나님께서 지도자를 세워 이민족을 물리치시고 백성들을 구원하셨다. 그 지도자가 바로 사사였다. 사사가 다스리는 동안은 평화를 누리지만, 사사가 죽고 나면 백성들은 다시 하나님을 떠나게 되고, 그렇게 타락한 삶에 어려움이 찾아와 또다시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다시 한 번 사사를 보내는 식(삿 2:18-20)의 장난 같은 사이클이 사울 왕을 세울 때까지 반복되었다.
아무튼 이런 사사들은 민족의 영웅이자 존경받는 지도자였다. 우리로 치자면 김구나 안중근 같은 양반들인데, 이들 중 유명한 사람을 꼽자면 주일학교에서도 가장 많이 들려주는 기드온과 삼손이다. 그리고 성경을 읽은 분들이라면 옷니엘, 에훗, 드보라, 입다 정도도 귀에 익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쟁쟁한 사사들 중에 가장 별 볼 일 없는 사사가 한 명 끼어 있으니 그가 바로 삼갈이다.

에훗 후에는 아낫의 아들 삼갈이 있어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죽였고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삿 3:31)

이것이 삼갈이란 사사에 대한 언급의 전부이다. 남들은 적어도 한 장 이상의 서술이나 행적이 이어지는데 삼갈은 달랑 이게 전부이다. 게다가 이 서술도 나중에 끼워넣은 듯한 인상이 역력하다.
사사기 3장은 에훗이라는 탁월한 사사의 업적이 기록되어 있고, 4장은 드보라라는 보기 드문 여성 사사의 행적이 이어진다. 5장은 아예 드보라의 노래로 되어 있을 정도이다. 이 둘은 더없이 뛰어난 행적을 보여준 사사였다. 에훗은 모압 왕 에글론을 죽이고 이스라엘을 모압의 압제에서 해방시킨 영웅으로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이스라엘이 장장 80년의 평화를 유지했다.(삿 3:30) 에훗이 죽자 백성들이 타락하여 다시 20년 동안 가나안 왕 야빈의 압제를 받게 되는데, 드보라가 사사가 되어 바락을 시켜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를 물리치고 40년 평화(삿 5:31)를 이루어낸다.
이런 쟁쟁한 사사들 사이에 삼갈이 끼어 있다는 것은 성경 구절도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사기 3장 30절에 “그 날에 모압이 이스라엘 수하에 굴복하매 그 땅이 팔십 년 동안 평온하였더라.”라고 에훗에 대한 설명을 마친 후, 4장 1절을 보면, “에훗이 죽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 하는 식으로 드보라의 등장을 설명한다. 즉 3장과 4장의 자연스런 흐름에 3장 마지막 절인 31절로 그냥 삼갈의 이야기를 끼워넣은 듯한 형태인 것이다.
일단 여기서 삼갈이 한 일을 살펴보자. 사실 곰곰이 따질 것도 별로 없다.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죽였”다는 것이 전부이니 말이다. 물론 소 모는 막대기로 600명을 죽이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 일이 사사로서 한 전부라고 하니 조금 싱거운 느낌이 나지 않을 수 없다. 죽은 사람 수로만 쳐도 삼손이 나귀 턱뼈로 1,000명을 죽였으니(삿 15:15) 그보다 못하다. 게다가 삼손의 행적은 나귀 턱뼈 사건만 있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삼갈 행적의 문제는 ‘그러므로 ○○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이스라엘에 ○○ 동안 평화가 있었다.’는 사사기 특유의 공식적인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가 죽였다는 블레셋인 600명이 군인이 아니라 일반인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삼손이 나귀 턱뼈로 죽인 1,000명도 군인이 아니었다는 것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블레셋 왕을 물리쳤다.’라든가 ‘블레셋을 물리쳤다.’는 언급이 아니라는 것을 보면, 삼갈이 다른 사사들처럼 이민족의 왕이나 권세자를 물리친 것이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런 점은 드보라가 삼갈에 대해 언급한 것에서도 알 수 있는데, 드보라의 노래 구절에 삼갈이 등장한다.

아낫의 아들 삼갈의 날에 또는 야엘의 날에는 대로가 비었고 길의 행인들은 오솔길로 다녔도다(삿 5:6)


‘대로가 비었고 오솔길로 다닌다.’는 것은 이민족의 압제가 강력해서 큰길로는 못 다니고 숨어 다녔다는 의미로, 결국 이 노랫말은 삼갈의 때와 야엘의 때는 온전한 구원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에 드보라 자신이 사사가 되어 하나님의 일을 이루었다는 내용이 뒤에 이어진다. 이 구절에 등장하는 야엘은 가나안 왕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의 관자놀이에 말뚝을 박아서 죽인(삿 4:17-22) 여인이다. 그러니까 이 노래 가사는 이렇게 번역될 수 있다.

블레셋(삼갈의 때)과 가나안(야엘의 때)이 횡행하던 시절에는 무서워 큰길로는 못 다니고 뒷길로 숨어 다녔다.


만약 삼갈이 블레셋 왕을 물리쳤다든가 블레셋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면, 드보라가 이렇게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즉 삼갈이 600명의 블레셋인을 죽인 것은 맞다. 대단한 일이긴 하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 그의 행적은 결정적 한 방이 없다. 그저 그런 변변치 않은 사사였던 것이다.
에훗에서 드보라로 이어지는 사사시대의 웅장한 역사의 흐름 속에 대체 누가 이렇게 한미한(?) 사사 삼갈을 기록한 것일까?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내 생각엔 드보라 때문인 것 같다. 정확하게는 드보라가 노래에서 삼갈과 야엘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유명한 군대 장관 시스라를 죽인 야엘을 알겠는데, 삼갈은 누구야?


그렇다. 가나안 왕에게 결정적 타격을 주고 그의 무시무시한 군대 장관을 끝장낸 야엘은 알지만 삼갈은 사람들이 모른다. 구약성경에서 오래된 노래 중 손꼽히는 명편인 드보라의 노래 구절의 ‘삼갈의 때’를 설명하기 위해, 3장의 마지막에 그냥 끼워준 것 같다. 깍두기로 말이다.
깍두기, 모르는가? 왜 있지 않은가, 어릴 적 동네에서 친구들과 술래잡기나 다방구를 할 때, 꼭 끼워달라고 징징대는 어린 동생을 그냥 끼워주면서 시키는 그것 말이다. 잡히기는 해도 술래가 되지 않고 있기는 하나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깍두기. 그저 자신만 ‘나도 이 일을 했다.’고 믿으며 흥분해서 형들 따라 뛰어다니는 바로 그 깍두기 말이다.
삼갈은 깍두기였던 것이다.

“안다, 안다, 내가 안다”
세상 어디서나 영웅은 주목받는다. 영화나 소설에서도 그렇다. 슈퍼맨은 하늘을 날아다니고 배트맨은 밤의 수호자로 거리를 배회한다.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는 『삼국지』의 관우도 그렇고, 장난꾸러기 손오공도 그렇다. 역사도, 문학도 온통 영웅들의 독차지다.
영웅이 아니어도 주인공이 되는 경우가 많다. 하찮고 별 볼 일 없는 약한 자, 병든 자, 심지어 사회부적응자나 바보들도 그들 이야기에서는 주인공이다. 그래서 섹스중독증에 빠진 변강쇠도 주인공이 되었고, 바보 중에 바보인 상바보 이반도 톨스토이의 손끝에서 화려하게 살아났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뒤집고 찾아봐도 삼갈 같은 이는 없다. 영화도, 소설도, 동서고금의 이야기 어디에도 그처럼 영웅이면서도 주목받지 못하는, 단 한 줄로 이야기가 끝나는 인물은 없다. 이유는 너무 분명하다. 그 정도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영웅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야엘처럼 드라마틱하게 군대 장관을 죽인 것도 아니고, 삼손처럼 무지막지한 일을 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냉정히 말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과 시비 끝에 일본인 장사치 한 명을 때려죽인 것을 같다고 할 수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일을 안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별로 대단한 일은 아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주목하지 않는다. 세상은 그렇다. 대수롭지 않은 일에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
나이가 늙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야곱에게 요셉은 자신의 두 아들을 데리고 와 축복을 받게 한다. 단순한 기도가 아니라 아브라함에서 이삭으로, 이삭에서 야곱으로 이어진 하나님의 중요한 정통성을 인정받는 자리였다. 요셉은 둘 중 장자인 므낫세에게 오른손을 올리도록 야곱 앞에 앉히고, 둘째인 에브라임에겐 왼손을 올리도록 앉힌다. 야곱이 그대로 손을 들어 각각 그 앞에 앉은 손자들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축복하면 되는 거였다. 그런데 야곱이 느닷없이 두 손을 엑스(X)자로 교차해서 손을 얹었다.(창 48:12-14) 그러니까 오른손으로는 왼쪽에 앉은 에브라임의 머리 위에 얹고, 왼손으로는 오른쪽에 앉은 므낫세의 머리에 얹은 것이다.
단순히 오른손 왼손의 문제가 아니라 오른손으로 축복을 받는 자가 장자의 축복을 받는 거였고, 장자의 축복이란 그 가문의 정통성을 잇는 것이고, 그건 곧 그 가문 족속 모든 것을 통솔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자와 차자는 단순히 첫째, 둘째의 차이 이상의 하늘과 땅의 격차가 있는 거였다. 기실 야곱도 형 에서의 장자권을 획득한 것이 아니던가. 그래서 형이 죽이려 했고 그로 인해 평생을 나그네로 떠돈 것이다.
이러니 요셉은 몸이 달았다. 딱히 첫째인 므낫세를 편애해서가 아니었다. 장자가 장자가 아닌 것처럼 되어버리면 집안의 권위가 엉망이 되고 가문이 내분될 수도 있었다. 동서양 황제들의 계승 쟁탈전을 떠올려보면 요셉의 황망한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가문의 존망이 달린 문제에 요셉은 억지로 아버지 야곱의 팔을 들어 바꾸려 한다. 사실 이때 야곱은 나이가 많아 눈이 보이지 않았다.(창 48:10) 그래서 아버지가 실수를 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속이 달은 요셉은 아버지 야곱에게 조아린다. “그리 마옵소서.”(창 48:18) 간절히 애원한다. 그는 필사적이고 절박했다.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앞으로의 일들을 떠올리면 그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야곱은 이렇게 말한다.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창 48:19)


이 야곱의 말은 내가 아는데 네가 웬 간섭이냐는 핀잔이 아니다. 중요한 예식에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경고도 아니다. 아버지 야곱은 아들 요셉이 왜 그러는지 너무나도 잘 안다. 그의 불안과 걱정, 다급함과 안타까움을 누구보다 잘 안다. 몰라서가 아니라 이래야만 하기 때문이었다. 므낫세도, 에브라임도 모두 큰 민족이 되겠지만 동생 에브라임이 더 큰 민족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창 48:19-20)
괴로움 그 모든 것을 알지만 그의 생각과 염려보다 더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과 사랑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자애로운 아버지의 위로와 사랑의 음성이었다.
그건 소소하게 에브라임이 더 낫고 므낫세가 덜한 문제 따위가 아니었다.
삼갈은 세상 관점에서 보면 그저 그런 시답지 않은 자였다. 블레셋을 완전히 몰아낸 것도 아니고, 우두머리를 격퇴한 것도 아니었다. 멋지고 드라마틱한 이야깃거리도 없다.
그런 그를 하나님은 주목하셨다. 그리고 ‘사사’라고 명명해주셨다. 백성들의 재판관이 된 것 같지도 않고 군대를 이끈 적도 없어 보이지만, 백성들은 여전히 블레셋의 압제에 시달리고 있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그를 사사로 인정하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했다.’라고.
하나님은 거짓말을 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에서 구원받지 못했다. 드보라의 노래처럼 ‘삼갈의 때’는 여전히 블레셋이 판을 치는 시기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으셨다. 요셉의 장자인 므낫세보다 차자인 에브라임이 더 큰 민족이 될 것이라고 본 것처럼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은 세상이 보는 관점과 달랐다. 그리고 그렇게 보시는 이유는 우리가 알 재간이 없다.
구원받지 못한 때에 이스라엘을 구원했다고 보시고, 별 볼 일 없는 농부를 두고 위대한 사사들과 똑같이 보시는 이유를 도통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이런 소리는 들리는 것 같다.

안다, 안다, 아들아, 나도 안다.


들리시는가? 당신의 슬픔과 눈물, 후회와 괴로움, 그 위로 들려오는 아버지 하나님의 음성 말이다.

유광수 |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연세대학교 대학원(문학박사)을 졸업했으며 현재 연세대학교 학부대학 부교수이다. 한국고전문학을 전공했으며, 2007년 『진시황 프로젝트』로 제1회 뉴웨이브문학상’을 수상했다. 쓴 책으로 『왕의 군대』 『윤동주 프로젝트 1, 2』 『가족기담』 『고전, 사랑을 그리다』 등이 있다.

 
 
 

2021년 9월호(통권 753호)

이번호 목차 / 지난호 보기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