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 대한기독교서회 | 회원가입 | 로그인
사이트 내 전체검색

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와신학 > 성서정담 - 성서의 눈으로 보는 세상살이
문화와신학 (2016년 5월호)

 

  밥 한번 먹자!
  

본문

 

1 ‘밥 한번 먹자.’라는 특별한 인사가 있다. 대체로 헤어질 때 하는 말이다. 특별한 의미를 담지 않을 때도 많지만, 그 말을 헤어지는 인사말에 포함시키는 이유가 궁금하다. 거기에 진심이 담겨 있는 경우라면, 그것은 좀 더 가까이 지내고 싶다는 의사표현일 것이다. 식탁을 함께 나누는 것만큼 사람 사이를 가깝게 만드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홀로 지내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요즘에 이 인사는 허전함마저 달래주는 말이 될 수 있다. 식탁에서 느낄 수 있는 사람의 온기를 기대할 수 있어서 그럴 것이다. 이처럼 먹는다는 것은 단지 생물학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이상의 사회적 의미를 수반하는 행위가 되기도 한다. 사회적 행위로서의 ‘밥 한번 먹자.’는 것은 말 그대로 밥이나 한번 먹자는 말이 아니다. 그렇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겠으나 대개는 관계의 지속과 심화를 내심 목표로 한다. 그래서 누구와 밥 한번 먹느냐는 것도 꽤나 중요한 관심사가 될 수 있다. 함께 먹는 것이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 되면 될수록 함께 먹는 자가 누구냐가 중요해진다.
성서에서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몇몇 예를 들어보자.
다윗은 왕위에 오른 후 자신의 절친이던 요나단을 기억하고 사울 집안의 남은 후손을 찾는다.(삼하 9장) 다윗은 집안이 몰락한 후 남의 집에서 살고 있던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찾아내 사울의 밭을 돌려주고 항상 왕 앞에서 식사를 하게 한다. 왕권과는 무관하지만, 므비보셋은 이제 사울의 가문을 이어갈 수 있는 자로 복권되었다.
이와 비슷한 경우를 열왕기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책이 1차 포로 때 잡혀간 여호야긴이 바벨론 왕 앞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는 보도로 끝난다는 것은 눈여겨볼 만하다.(왕하 25:27-30) 그의 신분 회복을 상징하는 왕 앞에서의 식사는, 예레미야 24장 1-7절의 예언과 연관해서 본다면, 예언이 실현되어 가는 과정의 하나로 이해될 수 있어서, 그것을 보도하는 역사가들은 거기서 망국 회복의 기미를 보려고 했을 수 있다.
이러한 예들은 물론 특별한 경우에 속한다. 그렇다 해도 식사의 기본 성격이 다르거나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함께 식사하는 것은 과거 상처를 씻어내기도 하고, 희망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정겨움과 즐거움을 선사하기도 한다. ‘밥 한번 먹자.’가 그저 인사말이 아니면 좋을 이유이기도 하다. 사람 냄새 흠씬 묻어나는 식탁이 마련된다면 그것은 그만큼 사람의 마음을 푸근하고 넉넉하게 만들지 않겠는가?
성서에는 아주 특별한 식사 이야기가 있다. 하나님이 모세와 아론과 그의 아들들 그리고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식탁에 초대하였다.(출 24:1-11)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고 그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고자 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의 구원자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은 그에게 구원받은 자들로 그의 백성이 되는 데 있다. 이 관계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법을 주고 그들은 이 법을 지키는 것으로 구체화된다.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법은 은총의 산물일 뿐 아니라 은총의 지속을 위한 특별한 장치이다. 출애굽의 은총을 경험한 이스라엘이 관계 지속을 위한 하나님의 제안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는 계약관계가 성립되었다. 이를 확정 짓고 기념하는 자리가 바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함께하는 공동식사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스스로 인간의 계약 상대자가 될 만큼 자기를 낮추신 또 다른 은총의 자리이다. 거기서 ‘두 계약 당사자들’이 신뢰를 쌓고 사랑을 나누고 책임을 확인한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에게는 야훼가 아닌 다른 신들과 연관된 식탁에 앉는 것이 금지된다.
따라서 모든 식탁을 누구나와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닌 셈이다. 이에 대해서는 그것이 식탁의 개방성을 급진적으로 내세우며 비난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정도만 언급해두기로 하자. 하지만 우상화된 권력도 ‘다른 신들’에게 속할 것이다. 기도를 빙자한 조찬 모임 형식으로 권력자를 위한 식탁이 종종 마련된다. 부정한 권력자를 위한 기도 식탁은 결국 불의를 편들고 불의를 돕고 불의를 조장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식사자리이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악을 멀리하고 불의를 미워하는 것이라고 성서는 누누이 말하지 않던가? 그런데 거기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악이 선으로 바뀌고 불의가 정의로 포장되고 억압이 평화로 선언된다. 악의 편에 서는 그런 식사자리를 찾고 마련하는 것이 교회들이요 목사들이라면, 성서를 읽는 독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그들 위에 와 있음을 보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대하 19:2 비교)
이렇듯 식탁은 모두에게 열릴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밥 한번 먹자.’는 말도 마찬가지다. 누구에게나 해도 좋은 말이 아니다. 돈과 권력을 위한 은밀한 거래가 아니라 사람의 온기와 정성을 나누는 식탁이기에 그렇다.

2 성서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여기서 고대근동의 ‘아다파 이야기’를 소개해도 좋을 것이다.(엘 아마르나 문서, 356) 그 이유는 이야기 끝에서 자연스레 밝혀질 것이다.
고대근동은 다신론 세계이다. ‘아누’라는 하늘의 신과 ‘에아’(=엔키)라는 땅의 신이 있었다. 에아의 제사장인 아다파는 어느 날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다. 그때 남쪽에서 불어오는 폭풍에 배가 뒤집혀 그는 바닷속 깊은 곳으로 내동댕이쳐졌다. 화가 난 아다파는 온 힘을 다해 남풍을 저주한다. 그는 에아에게서 큰 지혜를 부여받았고, 그래서 아다파의 말은 현실을 일으키는 힘이 있었다. 바람은 날개가 부러지고 일주일 동안이나 불지 않았다. 문제는 그 바람이 아누의 바람이었다는 데 있었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아누는 왜 남풍이 불지 않느냐고 주위에 묻는다. 사정을 알게 된 아누는 아다파를 불러오라고 명령한다. 그러자 지혜의 신 에아는 하늘에서 일어날 일들을 예측하고 아다파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세세하게 일러준다. 에아는 아다파에게 하늘에 이르면 먼저 두 신을 그의 편으로 만들어 그들이 아누 앞에서 아다파를 변호하게 하라고 일러준 다음, 아누의 제안에 대응하는 길을 가르쳐준다. 에아는 아누가 물과 빵을 주면 마시지도 말고 먹지도 말라고 한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죽음의 물이며 죽음의 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누가 기름과 옷을 주면 받아 바르고 입으라고 한다. 에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늘의 사신이 도착하여 아다파를 하늘로 데리고 간다.
하늘에서의 일은 에아가 말한 그대로 진행된다. 아다파 역시 에아의 지시대로 행동한다. 아다파를 본 아누는 곤혹스러워한다. 에아가 원망스러운 눈치이다. 아다파에게 자신의 바람의 날개를 부러뜨릴 정도로 큰 지혜와 능력을 준 신이 바로 에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누는 아다파에게 벌을 내리지 못하고 오히려 그에게 무엇인가 주어야 한다는 일종의 심리적 압박을 받는다. 그렇긴 한데 생명 외에는 마땅히 줄 것이 없다. 신의 전유물인 생명을 사람에게 주어야 하다니, 망설여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달리 어쩔 도리가 없다. 아누는 아다파에게 생명의 물과 생명의 빵을 갖다주라고 한다. 생명의 물과 생명의 빵? 에아는 죽음의 빵과 죽음의 물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생명의 떡과 물이라면 고민해볼 만도 할 텐데, 아다파는 주저 없이 거절하고 아누가 주는 기름과 옷만 받는다. 아누는 그제야 안도의 미소를 짓고 에아를 비웃는다. 에아는 저 어리석은 인간에게 왜 지혜를 주었을꼬?
아다파는 하늘에서 자신에게 베푸는 생명의 식탁을 거부하였다. 그 이유는 그가 왜 그랬냐고 묻는 아누에게 대답한 대로 자기의 신 에아가 그렇게 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생명을 얻기 위해서 아다파는 에아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를 불편해 하는 아누이지만 눈 딱 감고 그의 식탁을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다파는 땅으로, 다시 말해 생명만큼은 그에게 주지 않은 자신의 신 에아 곁으로 돌아와 죽을 운명의 ‘사람’으로 살아갈 것이다. 음식을 먹느냐, 안 먹느냐에 따라 그의 삶의 자리가 결정된다. 생명의 기회를 ‘버린’ 아다파! 생명의 기회를 모르지 않았을 아다파였다.
그런데 에아는 생명의 음식인데 왜 죽음의 음식이라고 했을까? 속인 것일까? 그 음식을 먹으면 아다파는 분명 생명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리는 아누와 함께하는 자리로서 에아를 떠나는 결과를 낳는다. 에아가 생명의 빵과 생명의 물을 죽음의 빵이요 죽음의 물이라고 한 것은 이를 막기 위한 고육책이었을 것이다. 에아에게는 아다파가 자신에게서 아누에게로, 땅에서 하늘로 옮겨가는 것이 아다파의 죽음과 같다. 이제 모든 것은 아다파에게 달려 있다. 아다파는 에아의 말을 따라 생명을 거부함으로써 두 신을 ‘구원한’ 셈이 됐다.
식탁은 이처럼 삶의 자리를 상징한다. 이러한 식탁 이해를 뒷받침하는 고대근동의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신들의 사랑 이야기인 ‘네르갈과 에레쉬키갈 이야기’가 그것이다.(슐타네페 판본) 간단하게 소개해보기로 한다. 네르갈은 하늘의 신들 중 하나이고, 에레쉬키갈은 지하세계의 주인이다. 하늘과 지하세계는 긴 사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에레쉬키갈의 사신이 하늘에 오면 하늘의 신들은 예를 갖춰 그를 맞이한다. 사신이 왔을 때 그 예를 지키지 않은 네르갈은 지하세계로 불려간다. 아누는 길을 떠나는 네르갈에게 그들이 보좌를 가져오면 앉지 말고, 음식과 고기와 맥주를 주면 먹지도 마시지도 말고, 발 씻는 물을 주면 발을 씻지 말 것 등을 당부한다.
그런데 에레쉬키갈은 지하세계로 내려온 네르갈을 사랑하게 되고 함께 6일을 보낸다. 그러나 7일째 되는 날, 네르갈은 에레쉬키갈의 이름을 팔아 수문장을 속이고 지하세계를 탈출한다. 이를 모르는 에레쉬키갈은 사신을 시켜 네르갈에게 지하세계의 음식을 먹게 하고 물을 마시게 하라고 지시한다. 이때 비로소 사정을 알게 된 에레쉬키갈은 사랑을 앓으며 사신에게 네르갈을 데려오라고 한다. 아누가 이를 들어주지 않으면, 죽은 자들을 다 풀어놓겠다는 위협과 함께 사신을 보낸다. 아누는 이를 예상하고 이미 네르갈을 대머리에 사팔눈에 불구로 만들어 위장해놓았다. 사신은 세 번이나 하늘의 신들을 샅샅이 훑어보며 네르갈을 찾았지만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가 에레쉬키갈에게 보고한다. 사신이 대머리에 사팔눈에 불구의 신에 대해 이야기하자 에레쉬키갈은 그가 네르갈임을 직감하고 그를 붙잡아오라며 사신을 다시 보낸다. 사신을 따라 다시 지하세계로 내려온 네르갈은 크게 웃으며 에레쉬키갈을 끌어안고 둘은 사랑을 나눈다. 이에 아누는 사신을 보내 네르갈을 지하세계에서 영원히 살도록 한다.
여기서도 볼 수 있는 대로 음식은 삶의 자리를 결정한다. 이러한 성서 안팎의 이야기들은 창세기 2-3장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여기에는 그러한 것들을 추정하게 할 만한 것이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거기서 하나님은 그가 창조한 사람(하-아담=‘그’ 사람)을 동산 안에 두고 명령한다. “동산 안의 나무 열매들은 다 먹으라. 단 ‘좋고 나쁜 것을 아는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 먹으면 너는 정말 죽는다.”(‘선악’이라는 윤리적 개념으로 ‘토브 봐-라아’를 옮기는 것은 이야기 전체의 맥락에 어울리지 않는다. 이것은 일상생활에서 무엇이 좋은지 무엇이 나쁜지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데 금지된 나무 열매의 효능 자체는 이름이 말하는 대로 죽음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또 그 말이 사람은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될 수도 없다. 명령의 긴박성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그의 명령을 어긴 사람을 ‘즉각’ 죽일 리도 없다.
그렇다면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앞에서 본 대로 먹는 것이 삶의 자리와 연관된다면, 죽음은 그 열매가 비록 동산 안에 있지만 그것은 동산 안에서의 삶과 무관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것은 동산 안의 삶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 열매는 동산 밖 삶과 연관되어 있고 또 그 삶을 가능성으로 전제한다. 동산 밖의 삶을 위한 동산 안의 나무이다. 따라서 ‘정말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은 무엇보다도 사람이 그것을 먹으면 그는 동산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없게 되리라는 내용을 함축하는 만큼, 사람을 동산 안에 두고 싶어 하는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을 드러낸다.
이 점에서 하나님은 앞 이야기의 에아와 비교된다. 이를 모르는 사람은 정말 죽는다는 하나님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나무를 죽음의 나무로 여긴다. 뱀의 질문에 대한 하와의 말은 하나님의 그 말이 사람에게 죽음에 대한 공포를 불러일으켰음을 보여준다. 뱀과의 대화로 이 공포에서 벗어나게 되었을 때 사람은 그 열매를 먹는 것의 의미를 모른 채 그 나무와 마주 서게 되고 탐스럽게 자태를 드러낸 그 열매를 먹는다. 이로써 그의 삶의 자리가 하나님의 뜻과 다르게 결정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단절되었다는 결론을 허용하지 않는다. 동산 밖도 하나님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관계가 이전과 달라질 뿐이다.
일상에서 먹는 것이 이처럼 심각한 의미를 갖는 경우는 사실상 매우 적다. 그렇지만 적어도 상징적으로는 그러한 의미를 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경우가 없지 않다. 권력자들의 민생투어에 곧잘 등장하는 메뉴에는 그들이 생전 가보지 않았을 것 같은 시장에 들러 시민들이 먹는 음식을 먹어보고 시민들이 즐기는 막걸리를 마시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그들은 잠깐 서민들의 삶의 자리로 내려오는 연기를 하는 대신 긴 지지를 얻어간다. 독재자들이 위기 때마다 써먹던 식상한 수법이지만, 지금도 그 연극은 효과가 있는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차라리 속아주어야 속이 편한 다수 서민들의 순진무구함(?) 때문일 것이다.

3 먹는 것과 삶의 자리는 이처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성만찬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된다. 떡과 잔을 나누는 성만찬은 일차적으로 예수의 죽음을 기념하는 의식이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를 단순히 회상하는 데 그치는 좁은 의미의 기념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그의 죽음으로 또 죽음에 이르는 그의 삶으로 우리 삶의 자리를 옮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념은 예수에 대한 기억이 우리 삶에 각인되고 우리 삶으로 구체화되는 사건을 지시하는 말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몸으로 기억하는 것이다. 행동을 낳는 기억이다!
그러나 성만찬은 예수의 과거와만 관련되지 않는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에서 유월절 식사를 다시 하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월절은 ‘애굽’으로부터의 해방을 넘어 ‘땅의 나라’로부터의 해방을 뜻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만찬은 과거를 현재화할 뿐만 아니라 미래를 앞당겨 실천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수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담은 것으로서 부활로 이어진다. 예수의 죽음을 불러내고 현재의 삶으로 바꾸는 것은 바로 미래로부터 오고 미래로 이끌어가는 부활의 힘 때문이다. 그렇기에 성만찬에서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예수의 미래에 참여하는 것이다. 곧 하나님 나라로 삶의 자리를 옮긴다는 선언과 같다.
성만찬의 시간은 이처럼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현재이다. 이러한 성만찬은 앞에서 소개한 창세기 2-3장의 이야기와 연관해서 볼 때 그 의미가 한층 더 잘 드러난다. ‘좋고 나쁜 것을 아는 나무’ 열매를 먹음으로써 하나님과 함께하는 동산에서 동산 밖으로 사람의 삶의 자리가 바뀌었다면,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를 나눔으로써 동산 밖 여기서 하나님 나라로 그 자리가 바뀌기 때문이다. 특히 예수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는 날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양자의 유사성은 더 커진다고 할 수 있다.[창 2:7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며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셨고’(엠퓌싸오, 히브리어로는 나파흐), 요 2:20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거룩한 영’을 불어넣으시며’(엠퓌싸오) 받으라고 한다. 이로부터 예수 사건은 제2의 창조사건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을 종합하면 두 사건의 내적 연관은 한층 깊어질 것이다. ‘창조-동산 안-동산 밖-창조-하나님 나라’의 순으로 성서의 시간이 전개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무엇을 먹는가가 삶의 자리를 결정한다면, 누구와 먹느냐는 그 자리의 성격을 보여준다. 성만찬이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담고 있다면, 그 소망의 현실화는 먹는 것의 관점에서 누구와 먹느냐는 문제로 귀착된다. ‘밥 한번 먹자.’고 말 건넬 사람들, ‘와서 밥 묵자.’고 할 사람들은 누구인가?
먹고 마시는 문제와 관련하여 예수에 대한 당시의 평은 “인자는 와서 먹고 마셨더니 그들은 말하기를 보라 (이) 사람은 먹보요 술고래에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한다.”라는 예수 자신의 말로 요약된다.(마 11:19, 눅 7:34) 이러한 평의 배경을 제공해주는 증언은 충분치 않다. 부분적이나마 마가복음 2장 15-16절이 이를 보여준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레위의 집에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가 세리와 죄인들과(*세리 곧 죄인들로도 읽을 수 있다.) 함께 먹다니, (이게) 어찌된 일이냐고 예수의 제자들에게 묻는다. 예수는 여기서 ‘밥 한번 먹자.’고 말하기보다는 그 말을 들은 위치에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중요한 점은 그 식탁의 구성원들이다. 이들은 예수의 지향과 분위기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예수의 이 모습에 어처구니없어 하는 바리새인 율법학자들의 반응은 그들이 사회적으로 기피대상이 된 천민과 같은 사람들임을 시사한다.
세리와 죄인들은 예수에게서 느낀 사람의 온기를 식탁에서 계속 이어가고자 예수와 밥상을 함께한다. 투명인간 취급당하는 그들에게 사람임을 일깨워주고 사람으로 세워주고 사람 되는 기쁨을 안겨준 예수에게 그들이 베푼 식탁은 예수가 마음껏 먹고 마냥 마셔도 좋을 자리 아닌가? 그들과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해 먹보니 술고래니 하며 뒤에서 수군대는 말들은 예수가 그들과 얼마나 신명나게 어울리는가를 보여줄 뿐이다. 그러한 식탁에서 그들에게 훈계하듯 연설을 늘어놓아 ‘축제’를 망치는 예수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그들에게서 ‘밥 한번 먹자.’는 말을 듣기만 하는 쪽은 아니었으리라. 위에 언급된 세리들과 죄인들은 아니지만 예수는 자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부른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요 6:26) 오병이어의 나눔 기적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나온 이 말에는, 그러나 비난보다는 안타까움이 배어 있다. 예수는 그들에게 떡을 나누며 생명의 떡을 나눠주기 원했기 때문이다. 기적의 식사가 그들의 눈을 열어 그들이 먹고 배불렀던 떡이 아니라 나눔의 기적을 베푼 예수를 볼 수 있었기를 그는 희망했다. 그렇다! 예수는 생명의 떡과 생명의 포도주로 식탁을 차리고 사람들에게 ‘밥 한번 먹자.’고 말을 건넨다. 그 밥상에서 사람들은 생명과 사랑을 먹고 마실 것이다. 로마제국에 짓밟히고, 지배자들에게 무시당하고, 하루하루의 생활이 힘겨워 예수를 좇던 사람들에게 예수의 밥상은 떡 이상의 떡을 먹게 하고 포도주 이상의 포도주를 마시게 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권력자들과 부자들에게 빼앗긴 하나님의 형상, 곧 사람됨을 그들에게 되찾아주는 식탁이다. 이를 볼 수 없었던 대중들에게 깊은 연민을 느끼는 예수였다.
예수의 식탁은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었지만, 위에서 보듯 누구나 그 식탁에 오는 것은 아니었다. 예수의 식탁을 붐비게 한 사람들은 성한 사람들이 아니다. 특히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이유로 입은 깊은 상처를 부여안고 살아가는 그들을 위한 식탁이 곧 예수의 식탁이었다.
누구와 먹느냐는 문제는 예수에게서 자기 정체성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물음이다. 이에 대한 답은 예수 주변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일자리가 없어 헤매는 사람들, 조롱과 기피 대상이 된 사람들, 몸과 맘이 성치 못한 사람들, 주변화된 여자들, 길거리로 내몰린 노숙자들, 권력의 폭력에 자식을 잃고 그 삶이 갈가리 찢긴 사람들 등이다. 그들이 밥 한번 먹자고 말해야 할 사람들이다. 지나는 인사로서가 아니다. 생명을 나누고 온기를 나누고 풀린 손과 무릎에 힘을 더해주는 식탁으로 부르는 말로서이다. ‘이리 와 밥 묵으라.’고, ‘이리 와 마시라.’고. 하나님은 놀랍게도 이를 그가 ‘기뻐하는 금식’이라고 한다.(사 58:6-7)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길이 다른 데 있지 않다.
예수는 그들에게 그렇게 말을 건네며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나누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약속한다.(마 25:31-46) 그것은 적선하듯 던져주는 것이 아니다. 내가 목마르듯, 내가 배고프듯 하는 행위이다. 그 고통에 마음이 젖고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이루어지는 일이다.(사 58:10) 그것은 몸의 요구가 채워지면 잊혀지듯 잊혀진다. 그러나 그것은 잊혀지지 않는다. 그들의 기억 속에, 예수의 기억 속에 기록된다. 예수가 기억 속에서 이를 꺼내 이야기하는 날, 곧 마지막 심판 때 그 밥상은 생명의 자리였음이 드러날 것이다. 생명이 생명을 낳는 평범한 진리의 확인이다.

밥 한번 먹자고!
이리 와 밥 묵자고 사람 부르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온다.

김상기 | 서울대학교 문리대를 나와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과 독일 뮌스터 대학교 신학부에서 구약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Dr. Theol.) 감신대와 한신대에서 강의하며, 백합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레위기Ⅰ- 대한기독교서회 백주년기념성서주석』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기도』외 다수가 있다.

 
 
 

2021년 9월호(통권 753호)

이번호 목차 / 지난호 보기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