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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와신학 > 엔도 슈사쿠와 건너는 깊은강 (15)
문화와신학 (2016년 5월호)

 

  흔적과 아픔의 문학 (15)
  역사소설의 세계② : 순교자 베드로 기베

본문

 

유럽의 일본인 유학생들
2008년 로마 교황청은 일본인 사제 베드로 기베(ペドロ岐部, 1587-1639)를 포함한 187명의 순교자들에게 복자(福者, Beatus), 즉 사후에 그의 신앙과 삶의 덕과 성스러움이 교회에 의해서 인정된 신앙인에게 주어지는 칭호를 부여하였다. ‘베드로 기베와 187인의 순교자’라고 불리는 이들은 1603년부터 1639년까지 일본에서 순교한 가톨릭 사제와 수도자와 신도를 총칭하는 이름으로, 이들은 2008년 나가사키 시에서 행해진 열복식(列福式)에서 복자로 추앙되었다. 이들 중에는 지금부터 거론하고자 하는 베드로 기베를 시작으로, 1582년(天正 10년)에 큐슈 지역의 키리시단 다이묘(大名)였던 오오토모 소린(大友宗麟), 오오무라 스미타다(大村純忠),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가 로마로 파견한 사절단[天正遣歐使節團]의 한 명인 나카우라 쥬리앙(中浦 ジュリアン, 1568-1633)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교회로부터 ‘복자’라는 칭호가 부여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베드로 기베는 지금까지 엔도가 자신의 작품에서 다루어온 이른바 ‘약자’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유형의 신앙인이었다. ‘약자의 문학’ 내지는 ‘약자의 복권(復權)의 문학’이라고 불리는 엔도의 작품 세계에서 ‘강자’가 지니는 의미는 무엇일까? 엔도는 베드로 기베에 대한 평전(評傳)인 『총과 십자가』(銃と十字架)의 “후기”에서 “그[베드로 기베]는 오늘날까지 내가 써온 많은 약자가 아니라 강한 사람에 속한 인물이다. 그러한 그와 나 사이의 거리감을 메우기 위해서 꽤 긴 시간이 걸렸다.”라고 밝히고 있는데, 그렇다면 엔도가 신앙의 ‘강자’로 분류되는 역사적 인물에 대해서 그려나간 이유는 과연 무엇이며, ‘약자’와 ‘강자’의 접점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엔도가 오랜 시간에 걸쳐서 ‘강자’인 기베와 ‘자신 사이의 거리감을 메우기 위해서’ 애쓴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호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엔도는 기리시단의 신앙과 역사를 연구하기 위해서 1965년 4월부터 예수회 소속 신부인 조치 대학(上智大學)의 치스리크 교수에게 사사하였다.1) 그러던 중 엔도는 특히 배교한 인물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른바 신앙의 강자와 약자에 대한 자신만의 생각을 형성해나갈 수 있었다. 당시 정황에 대해서 엔도는 「아사히신문」(朝日新聞, 1967년 8월 25일)에 기고한 “『침묵』-후미에가 길러준 상상”(『沈默』-踏絵が育てた想像)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당시 나는 아직 기리시단에 대한 공부가 깊지 못했기 때문에 미우라 슈몽(三浦朱門)을 불러들여서 조치 대학의 치스리크 교수님을 찾아갔다. 치스리크 교수님은 기리시단 학자로서 이미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기리시단에 관한 책들을 조금씩 읽어나갔는데, [중략] 장렬하게 순교한 강자가 아니라 비겁함과 육체의 약함, 죽음에 대한 공포, 그리고 오직 가족을 살려야겠다는 일념으로 끝내는 자신의 신념을 버리고 후미에에 발을 올려놓고 말았던 사람들에게로 내 마음은 쏠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느낀 것은 기리시단에 대한 많은 문헌들은 순교자에 대해서는 말하면서도 배반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약자’ 즉 ‘배교한 사람들’[転び者]에 대한 엔도의 관심이 어느 정도였는가는 지도해주던 치스리크 교수가 “어째서 당신은 그다지도 배교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겁니까?”라면서 쓴웃음을 지었다는 일화에서도 매우 잘 드러난다.
순교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신앙을 지켜내지 못하고 배교하지 않을 수 없었던 약자들의 아픔과 회한을 테마로 하면서 그러한 아픔과 회한의 동반자가 되는 예수의 이미지를 형성해나간 것이 엔도의 문학이라면, 과연 그의 문학적 세계의 중심축이 약자에게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엔도의 작품군 중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역사소설’의 막을 본격적으로 올린 작품으로서 엔도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침묵』에 등장하는 기치지로가 그러하였고, 지난번에 다룬 기리시단 다이묘인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도 히데요시가 “나를 택할 것인가, 그대가 믿는 데우스를 택할 것인가?”라고 강요하였을 때, 데우스를 버리고 히데요시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던 회한을 마음속에 지닌 채 평생을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엔도 스스로가 자신을 기치지로와 유키나가와 동일시한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약자’의 이미지가 사실 엔도의 자의식이기도 하다는 점은 재언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배교한 기치지로가 역시 후미에를 밟았던 로도리코에게-그는 배교 후 ‘배교자 바오로’라고 불렸다-고해와 같이 털어놓은 다음의 말은 엔도 문학의 주제가 어디에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들어주십시오. 아무리 배교자 바오로라도 고백성사를 줄 힘이 있다면 저의 죄를 용서해주십시오. …저는 신부님을 팔아넘겼습니다. 후미에에도 발을 올려놓았습니다. …이 세상에는 약자가 있습니다. 강자는 그 어떤 고통에도 굽히지 않고 천당에 갈 수 있겠지만, 저같이 태어나면서부터 약자는 후미에를 밟으라고 관리들이 고문하면….” 기치지로의 말을 듣고 로도리코는 이렇게 자기 자신에게 말한다. “강한 자도, 약한 자도 없다. 강한 자보다 약한 자가 괴로워하지 않았다고 그 누가 단언할 수 있을까?” 엔도가 배교한 신부 로도리코의 입을 빌려서 고백한 “강한 자도, 약한 자도 없다.”라는 말은 앞서 엔도가 『총과 십자가』의 “후기”에서 썼던 말, 즉 “강자인 베드로 기베와 나 사이의 거리감을 메우기 위해서 꽤 긴 시간이 걸렸다.”라는 말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엔도의 기리시단 연구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치스리크 신부는 이미 1963년에 베드로 기베에 대한 연구 논문을 발표하여, 당시까지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베드로 기베라는 인물의 행장(行狀)과 그 신앙의 세계를 드러내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렇게 본다면, 다른 기리시단 다이묘에 대한 엔도의 서술과 마찬가지로 베드로 기베에 대한 연구도 치스리크 신부와의 만남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베드로 기베에 대한 엔도의 묘사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곳은 『유학』(留學, 1965)이라는 작품집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유학』은 엔도 자신의 프랑스 유학 체험을 바탕으로 하면서 자신처럼 유럽으로 유학한 일본 신앙인들에 대해 다룬 작품집으로 “제1장 루앙의 여름”(ルアンの夏), “제2장 유학생”(留學生), “제3장 그대도, 또”(爾も、また)라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미 앞의 글에서 거론하였듯이 엔도가 1950년에 프랑스로 유학한 것은 당시 프랑스 가톨릭교회가 독지가들의 헌금으로 일본의 젊은이들을 프랑스에 유학시킨 후 장차 일본에 귀국하여 일본에서의 선교를 촉진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런 점에서 엔도는 자신의 프랑스 유학이, 기리시단 시대의 선교사들이 일본의 젊은 신앙인들을 유럽에까지 데리고 가서 기독교 세계를 보여줌으로 일본에서의 기독교 선교의 활성화를 꾀하였다는 사실과 오버랩된다고 느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자신은 어머니의 의지에 따라 세례를 받았을 뿐이라는 자의식, 그리고 일본의 범신적 영성과 기독교의 일신교적 세계 사이의 ‘거리감’ 속에서 방황하고 있음을 명백하게 의식한 엔도로서는 일본에서 온 기독교 신자인 자신을 바라보는 프랑스인들의 시선에 ‘무거운 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유학』에 실린 작품 “제1장 루앙의 여름”에 등장하는 유학생 쿠도(工藤)는 엔도의 분신(分身)이라고 할 수 있다. 쿠도는 사제를 지원했다가 불의의 사고로 일찍 세상을 떠난 아들을 잊지 못하는 프랑스 여인 페로 부인의 집에 기거한다. 아들에게 걸었던 꿈을 자신에게서 실현하고자 하는 페로 부인의 모습과 장차 일본에서의 포교를 위해 큰 역할을 기대하는 주위 사람들의 기대에 쿠도는 ‘우울함’과 “무거운 중압감’을 느낀다. 그는 “이런 친절은 내게 오히려 괴로움인 걸.”이라고 중얼거린다. 쿠도는 거울을 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은 아무리 보아도 지저분하였다. 그것은 그의 용모가 못생겼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대의 참된 모습”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온순한 얼굴을 하면서 앞으로 손을 모은 자신이 진정한 자신일까? 그것은 페로 부부나 안느 씨의 눈에 비친 일본 청년의 모습이다. 루앙에 도착한 날, 계단 밑의 뜰에서 교회 부인들에게 둘러싸여서 사제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 쿠도는 이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인가부터 다른 이들 앞에 설 때마다 쿠도는 언제나 이런 자세를 하는 습관이 생겼다. 점심 무렵 길을 걸을 때, 누군가가 “페로 씨 집에 계신 일본인이군요. 루앙은 마음에 드세요?”하고 물으면 입술에 곧 미소를 띠면서 “네, 언제까지나 살고 싶은 생각이 드는군요.”라고 말하곤 할 때도 쿠도는 이런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프랑스 신자들이 모아준 돈의 일부를 봉투에 넣어서 저고리 주머니에 안전핀으로 고정해놓은 자신. 신자들은 일본의 포교를 위해서 쿠도가 역할을 해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 기대가 쿠도에게는 점점 우울함으로 변해갔다. 사제가 어깨에 손을 얹었을 때 무겁게 느꼈던 것처럼 그에게는 무겁고 힘들 뿐이었다.

이러한 심경을 토로한 엔도가 자기보다 훨씬 앞서서 유럽에 유학한 일본 최초의 유학생 아라키 토마스(荒木トマス, ?-1646)와 자신 사이에 모종의 유사함을 발견한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라키는 일본 출신의 성직자를 양성하기 위해 세워진 아리마 신학교(有馬セミナリオ)가 1587년에 포고된 히데요시의 기리시단 금지령으로 말미암아 폐쇄될 운명에 이르자, 당시 일본 순찰사였던 발리냐뇨가 마카오에 세운 신학교로 보내진 청년이었다. 당시 선교사들은 아라키에게 보다 넓은 기독교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그가 장차 일본 선교에 매진할 것을 기대하면서 아라키를 “서구인들과 같은 신학과 철학을 연찬시켜서 사제로 길러내고자” 하였다. 이렇게 해서 아라키는 유럽에 건너온 최초의 일본인 유학생이 된 것이다.
유럽에 불던 ‘일본 붐’에 편승하여 유럽으로 건너온 아라키에게 사람들은 “단지 그가 일본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의 일본 포교의 꿈을 그에게 강요”하였다. 교회의 신앙과 학식을 대표하는 추기경 로베르토 벨라미노-그는 후에 비오 11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는 “아라키를 특별히 총애하여 매일매일의 성무일도까지 함께 바칠” 정도로 그에 대한 기대가 컸다. 하지만 이런 기대는 아라키에게 ‘쓰리고도 무거운 짐’으로 의식되어 갔다고 엔도는 작품집 『유학』의 “제2장 유학생”에서 기술하고 있다.

모든 이들에게 기대를 받으면 받을수록 아라키 토마스는 점점 우울해져 갔다. 그는 벨라미노 추기경 앞에서 경건한 태도를 취하는 듯한 자신을 불쾌하게 생각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그처럼 훌륭한 인물로 인정받는다는 사실을 거부할 수 없음도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기대 속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아라키는 병으로 세상을 떠난 순찰사 발리냐뇨의 유언에 따라서 1617년에 45세의 장년이 되어 일본으로 돌아온다. 발리냐뇨는 아라키가 일본에 들어와 잠복(潛伏) 사제로서 활동하여 일본에서 포교의 불길이 꺼지지 않도록 하라고 유언하였다. 극심한 금지령 속에서 몰래 신앙을 유지해나가던 신자들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하나씩 체포되어 나감에 따라 비교적 관헌의 눈에 띄지 않는 일본인 사제 아라키를 더욱 의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죽음을 당하는 일본인 신자의 수는 날로 늘어날 뿐이었다. 엔도는 “이 무렵 아라키 토마스의 태도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하였다.”라고 쓰면서 아라키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조금 긴 글이지만 인용해보겠다.

때때로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반교회적인 말을 흘리기도 하였다. 그의 마음속을 보여주는 문헌은 없지만 그것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을 것이다.

기리시단 금지를 알면서도 외국인 선교사들은 하나둘 일본으로 밀항해 온다. 그들에게는 일본을 기독교의 나라로 만든다고 하는 맹렬한 꿈이 있으며, 죽음조차 마다하지 않는 영웅주의가 그들을 사로잡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휘말려들어간 가난한 농민 신도들은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선교사들은 신도들에게 순교의 꿈을 강요한다. 순교를 기대하고 있다. 지금 순교만이 신에게 이르는 길이고, 만일 순교를 거부한다면 신을 배신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런 가혹한 길 외에 달리 신앙의 길은 없는 것일까? 이것이 아라키의 생각이었다.

그때 아라키는 선교사들의 이상(理想)에 끌려다니는 일본 신도들의 모습과 로마에 있을 당시 자신의 모습을 겹쳐보았다. 모든 이들의 꿈에 맞추느라고 자신의 모습을 부풀려서 보여주려던 나머지 몸과 마음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던 유학생활을 생각하였다. 아라키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이제 이것으로 충분해. 나를 이제 그만 놓아줘. 일본인에게 당신들의 생각을 강요하지 말아줘.”

1619년 8월 10일에 나가사키 부교소(奉行所)에서 몇 명의 관리가 찾아왔을 때 아라키는 떨면서 오랏줄을 받았다. 부교소에서 신앙을 버릴 것을 명받았을 때 처음에는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고문을 받게 되자 그는 곧 신앙을 버렸다.


이후 아라키는 사람들에게 ‘배교한 신부 베드로’라고 불리면서 일본을 찾아온 선교사들을 회유하는 역할을 강요받는다. 1634년 스페인 국적의 배가 일본에 표류한 적이 있는데, 그 배에는 도미니크 수도회의 선교사 미카엘 오자라자 신부 일행도 타고 있었다. 아라키는 관헌에 불려나가 선교사 중 한 명인 오자라자에게 유창한 라틴어로 말하였다.

아라키는 일본에서는 이미 신도들이 너무나도 많은 피를 흘렸으며, 선교사들이 밀항해 올 때마다 일본인은 더욱 많은 피를 흘릴 수밖에 없다고 말하였다. “제발 로마교회는 더 이상 일본인들을 상관하지 말아주시오. 더 이상 일본인들에게 당신들의 이상과 꿈을 강요하지 말아달란 말이오.” 오자라자 신부는 아라키가 말을 마칠 때까지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 상대방의 이야기가 끝나자 한마디 하였다. “그대의 라틴어는 매우 훌륭하지만, 그와는 달리 그대의 신앙은 나쁘군요. 그대의 유학은 헛것이었소.”

신앙을 버리기를 거부한 오자라자와 다른 두 명의 신부들은 혹독한 고문을 받고 숨졌다. 아라키 역시 마음의 가책을 받아서 순교했다는 이야기도 있음을 엔도는 소개하면서 “물론 이것은 맞는 말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총과 십자가』: 교회와 예수 사이의 거리
앞에서 언급한 아리마 신학교 출신 중에는 배교자 아라키 토마스와는 달리 ‘장렬한 순교’의 길을 걸어간 인물도 있었다. 베드로 기베-일본명은 기베 시게카츠(岐部茂勝)-도 그중 하나이다. 베드로 기베는 앞에서 언급한 『유학』에도 잠시 등장하지만 본격적인 인물로 등장하는 것은 『총과 십자가』(銃と十字架, 1979) 또한 기베는 장편소설 『왕국에 이르는 길』(王国への道—山田長政)과 희곡 『메남 강의 일본인』(メナム河の日本人)의 주인공인 야마다 나가마사(山田長政)와 대조되는 중요한 인물로서 등장한다.(이 두 작품의 개요에 대해서는 앞의 연재글을 참조하기 바란다.) 그런데 이들 작품, 곧 『유학』, 『총과 십자가』, 『왕국에 이르는 길』, 『메남 강의 일본인』은 일본을 떠나서 자신들의 꿈을 전개하고자 한 일본인들을 다룬다는 공통점을 지닌다.(메남 강은 태국의 방콕을 흐르는 강의 이름으로서 현재는 챠요프라야 강이라고 불린다.)
『총과 십자가』는 1978년에 월간지인 「츄오코론」(中央公論)에 “총과 십자가-아리마 신학교”(銃と十字架-有馬神学校)라는 제목으로 1년간 연재된 글이다. 엔도는 이 작품의 초판본의 “후기”에서 베드로 기베에 대해 쓰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10년 전에 언뜻 읽은 치스리크 교수님의 논문이 베드로 기베라고 하는 인물, 즉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대단히 극적인 삶을 살았던 17세기의 한 일본인의 존재를 가르쳐주었다. 그 후 나는 동남아시아나 유럽을 여행할 때마다 그의 족적을 찾아보게 되었고, 큐슈(九州)의 시마바라(島原)를 찾아갈 때마다 기베나 기베의 동료들이 처음으로 서구에 대해 배운 학교를 찾아가게 되었다. 그는 나의 마음속에서 성장하고 활동하였으며 걸어다닌 것이다. 그는 오늘날까지 내가 써온 많은 약자가 아니라 강한 사람에 속한 인물이다. 그러한 그와 나 사이의 거리감을 메우기 위해서 꽤 긴 시간이 걸렸다.

엔도가 역사적 인물에 대한 자료를 근거로 평전을 쓰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은 엔도가 소설가로서 추구해온 세계, 곧 일본인인 자기 자신과 서구의 기독교가 전해준 예수의 이미지 사이의 ‘거리감’을 좁히려는 실존적인 노력으로부터, 한 걸음 나아가 개인의 신앙과 교회라는 조직 사이의 ‘거리감’에 주목하였음을 의미한다. 엔도 연구자인 야마네 씨도 말하듯이, 일본에서의 기독교 신앙인이라는 엔도 자신의 문제를 철저하게 추구하려는 ‘제1기’의 작업은 『사해의 언저리』나 『예수의 생애』에서 모종의 결실을 보았으며, 평전을 쓰기 시작함으로써 엔도의 작품세계는 ‘제2기’에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엔도는 “전기 속의 X”(伝記の中のX)라는 글에서 평전을 쓰는 자신의 자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어떤 인물의 전기를 쓴다는 것은 그 인물의 인생에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이다. [중략] 그러나 그때 전기작가에 의해서 쓰인 인물도 지하에서 역시 이렇게 외칠 것임에 틀림없다. “그것이 나의 전부가 아니야. 나에게는 그와는 다른 X가 분명히 있어.” 그러나 그 X란 도대체 무엇일까? X란 어쩌면 그 인물 자신도 죽기 전까지는 의식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이고, 숨을 거둘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각하게 되는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중략]

신만이 꿰뚫어볼 수 있는 이 영혼의 X. 그것을 신이 아닌 전기작가가 꿰뚫어보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 X를 대상인물과 그 인생으로부터 꿰뚫어볼 수 없다면 전기는 단순한 사전(史傳)에 지나지 않는다. [중략] 모든 자료는 거울에 비쳐서 좌우가 바뀐 그 사람의 얼굴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언뜻 보면 그 사람처럼 보이지만, 진짜 얼굴은 아닌 것이다. 그 속에서 그의 생애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X를 발견해내는 일, 그 일은 신만이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신을 대신해서 그러한 일을 하려는 것, 그것이 전기를 쓰는 자의 기쁨인지도 모른다.


한 인물에 대한 자료는 이미 다른 이들의 눈에 비친 그 사람의 모습이므로 거기에는 ‘좌우가 바뀐 그 사람의 얼굴’이 배어나올 뿐이다. 그 모습을 평전을 쓰는 작가 자신이라는 거울에 다시 한 번 비추는 작업이 평전 쓰기일 것이나 평전 작가는 ‘좌우가 바뀐 얼굴을 보여주는 자료’를 자신의 거울에다가 다시 한 번 굴절시킬 뿐, 좌우가 바뀌지 않은 본래의 얼굴을 비출 수는 없는 일이다. 엔도도 말하고 있듯이 그러한 일은 신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평전을 쓰는 자에게 요구되고 또 허락된 것은 다만 그 인물과 자신 사이의 ‘거리감’을 좁히려는 노력일 뿐이다.
『총과 십자가』에서는 지금까지 엔도가 추구해오던 ‘실존적’, ‘거리감’의 극복이라는 주제가 ‘조직적’, ‘거리감’의 극복이라는 주제로 전환됨과 동시에, 지금까지 엔도가 추구해오던 ‘약자’의 신앙이 기베와 같은 ‘강자’의 신앙 앞에서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거리감’을 극복하려는 시도이기도 하였다. 엔도가 “기베와 나 사이의 거리감을 메우기 위해서 꽤 긴 시간이 걸렸다.”라고 말하는 그대로이다.
우선 엔도가 자신의 취재 여행기를 묶어서 출판한 『주마등: 그 사람들의 인생』(走馬燈-その人たちの人生)에서 베드로 기베에 대해 기술한 부분을 옮겨보자.

쿠니사키(國東) 반도(半島)2)의 지도를 보면 그 끝에 기베라는 어촌이 있다. [중략] 내가 이 어촌에 가 보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약 400년 전에 여기서 태어난 한 청년이 일본인으로는 처음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유럽에서 공부하기 위해 일본에서 마카오로 건너갔으며, 마카오로부터 멀리 페르시아를 횡단하여 성도(聖都)인 예루살렘을 거쳐 로마로 들어갔다. 청년의 이름은 베드로 기베이다. 그의 가계는 기베를 지배하던 기베 일족으로서 기리시단 다이묘인 오오토모(大友) 가의 가신이었기 때문에 그 양친도 열심 있는 신자였다.
아리시마 신학교 출신인 기베는 기리시단 금지령이 발포된 1615년에 일본을 떠나서 필리핀, 마카오, 고아로 전전하였으며, 드디어는 아라비아 사막을 횡단하여 예루살렘을 거쳐 로마로까지 여행하여 사제 서품을 받았다. 사제가 된 기베는 자신이 걸어간 길을 되돌아, 여전히 선교가 금지되어 있는 일본으로 돌아와서는(1630) 9년 동안 잠복하면서 선교활동에 매진하였다. 그는 마침내 관헌에 체포되어 신앙을 버리도록 강요받았으나 ‘구멍에 거꾸로 매달기’[穴吊り]라는 혹독한 고문에도 끝내 자신의 신앙을 버리기를 거부하고 1639년에 순교하였다.
기베에 대해서 엔도가 지니는 관심의 일단(一端)은 당시 교회의 선교정책에 대한 이해를 둘러싸고 보인 그의 반응에 있다. 텐쇼 사절단의 일행으로서 기베처럼 유럽에 유학한 청년들은 일본에서 유럽에 이르는 여행을 통해 한편으로는 신의 영광을 느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도를 표방하는 자들이 저지른 악과 죄를 고스란히 목도하게 되었다. 사절단의 한 사람인 치지와 미겔(千々石ミゲル, 1569-1633)은 기리시단 다이묘인 아리마 하루노부의 조카였는데, 그는 유럽에서 돌아온 후 기독교가 “겉으로는 후세에 보리(菩提)의 이치를 가르치면서도 안으로는 남의 나라를 빼앗는다.”는 사실에 고민한 나머지 기독교 신앙을 버리게 된다. 엔도는 이 점을 중요시하면서, 기독교의 본질적인 가르침과 현실적인 교회 사이의 괴리라는 문제야말로 기베를 비롯하여 아리마 신학교 졸업생들이 피할 수 없었던 무거운 짐이었다고 쓰고 있다.
『총과 십자가』는 이처럼 신앙적 이상과 정치적 현실 사이에서 번민하는 기베의 모습을 그려나간다. 기베는 히데요시가 일본에서의 기독교 선교를 허용한 것도 선교사들을 통해서 ‘총’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에서 비롯된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주인인 노부나가(信長)가 정토진종 혼간지(本願寺)파인 잇코슈(一向宗)가 조직한 승려, 무사, 상인들에 의해 일어난 무장종교세력의 저항운동인 ‘잇코잇키’(一向一揆)로 인해 어려움을 겪은 것을 잘 알고 있던 히데요시는 기리시단들 역시 자신을 향해서 ‘총’을 겨눌 가능성이 있음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1587년 6월, 그는 마침내 일본에서의 기독교 선교를 금지하는 ‘선교사 추방령’을 내린 것이다. 이는 히데요시의 정치논리, 즉 “이용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이용해 먹지만, 이용할 수 없게 될 때에는 헌신짝처럼 버린다.”라는 논리의 연장선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이와 동시에 엔도는 17세기의 아리마 신학교 생도들과 20세기의 자신 사이의 일치를 찾아낸다. 다시 말해서, 비록 “그 혈관 속에는 자신의 신념을 바꾸지 않으려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강함과 넓은 바다나 이국을 감연히 건너가려는 모험가의 용기가 흐르는” 기베였지만, 기리시단 금지령이 내려진 가운데 아리마 신학교의 학생들은 “전쟁 중, 마찬가지로 압박받는 기독교의 제자였던 소년인 내가 맛본 이상의 어둡고 음울한 심정”을 그들의 가슴 깊은 곳에 감추고 있었다.
기베는 1606년, 6년간에 걸친 신학교 수업을 마치고 아리마 신학교를 졸업했지만, 당시의 선교사들은 일본인을 사제로 서품하기보다는 선교사를 돕는 역할, 즉 도쥬쿠(同宿)라고 불리는 하급전도사로서 일을 시키는 선에 그치고자 하였다. 신부가 되려는 열망을 품었던 기베로서는 8년간이나 도쥬쿠 이상의 지위를 얻지 못한 것이 대단히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었다. 그런 와중에 일본의 실권자 이에야스(家康)가 실질적으로 기독교를 금지하기에 이르자 기베는 해외에서 신부가 되어서 다시금 일본으로 돌아와 선교활동을 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마카오로 향한다. 이런 점에서 기베의 마카오행은 일본과의 ‘비통한 이별’이었지만 동시에 ‘모종의 희망’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마카오에서도 기베 일행은 ‘초대받지 않은 손님’에 불과하였고, 기베는 자신들이 예수회에서 ‘폐를 끼치는 식객’ 신세임을 절감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엔도가 일본에 남아 있는 기리시단 신자들을 ‘버리고’ 자신의 안전을 구하여 일본을 떠난 기베의 마음에서 ‘회한’(うしろめたさ)을 읽어냈다는 점이다. 기베가 훗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기를 희구한 근본 원인을, 엔도는 이 ‘회한’에서 찾고자 했다. “선조로부터 쿠니사키 지방의 해적의 피를 물려받은 기베는 바다를 건너서 먼 나라에 간다는 생각에 피가 끓어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고양된 기분과 동시에 회한도 그만큼 그의 마음에 남아 있었다. 그들은 일본의 신도들을 버리고 조국과는 반대의 나라로 가고자 하였다. 이 회한은 훗날 베드로 기베의 생애에 커다란 영향을 남기게 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마카오에서도 신부가 되는 길이 허락되지 않자 기베는 하급선원 조건으로 배를 얻어 타고 인도의 고아로 향한다. 이 여행에서도 기베는 “보아서는 안 되었던 것”, 즉 “기독교 국가의 동양 침략의 구체적인 모습”과 “침략을 기반으로 하면서 유럽의 기독교를 세계 각지에 넓히려는” 모습에 직면한다. “당시의 유럽의 교회가 포교의 확장을 위해서 동양과 신대륙과 아프리카의 나라들을 침략하는 것을 묵인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 시대의 선교사들은 독립을 유지하면서 이단의 종교를 믿는 국민보다는 기독교 국가에 정복되어서 개종하는 민족이 훨씬 행복하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엔도는 “텐쇼 소년 사절단의 한 소년의 눈에, 기독교는 침략을 긍정한다는 의문이 일어났을 때, 그의 신앙은 무너졌다.”라고 썼는데, 기베도 유사한 상황에 직면하였다고 본 것이다. 무력을 바탕으로 기독교를 포교한다는 논리는, 자신의 세력을 지킨다는 정치적 논리에 의해 기독교 포교를 금지한 일본의 위정자들과 동일한 논리, 곧 ‘총’의 논리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실에 엔도는 “기베의 후반생의 비밀의 하나가 있다.”라고 쓰고 있다.
고아에서도 신부가 되는 길이 막혀 있음을 알게 된 기베는 아라비아 사막을 횡단하여 예루살렘에 이른다. 엔도는 기베가 이러한 모험을 감행할 수 있던 배경에는 목숨을 걸고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는 일본 신도들에 대한 ‘부채의식’(負い目), 즉 ‘회한’이 있었다고 본다. 기베가 사막에서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예수가 사막에서 체험한 것과 유사한 것이었다.

어둠에 감싸인 사막의 적막을 맛본 자는 그 밤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고 있다. 육체적인 위험이 아니라 신앙의 의혹에 돌연 사로잡히는 것도 허무만을 느끼도록 해주는 저 사막의 밤이다. 영원히 이 세계가 무의미하고 공허하다는 감각이 드는 것도 사막의 밤이다. 베드로 기베가 믿는 예수도 사해(死海)의 언저리, 유다의 사막에서 이 허무를 맛보았다. 성서는 그것을 예수에게 덥쳐온 악마의 유혹이라는 형태로 쓰고 있지만, 베드로 기베도 이 순례의 길에서 같은 유혹을 받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자신들의 고통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박해를 받는 고국에서 일본의 신도들이 저다지도 괴로워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럼에도 신은 왜 침묵하고 계시는가? 어쩌면 신은 없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예수가 가르친 신의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밤의 사막이란 종교를 믿는 자에게 그 근본적인 의혹을 차례차례 일으킨다. 영원의 침묵과도 같은 밤, 그것을 베드로 기베는 어떻게 뿌리쳤던 것일까?

엔도는 사막을 횡단하는 기베의 모습에 예수의 모습을 오버랩시키는데, 여기서 우리는 앞에서 제기한 질문, 곧 오랜 시간에 걸쳐서 강자인 기베와 자신 사이의 거리감을 메우기 위해서 엔도가 애쓴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기베처럼 ‘강자’가 되지 못하고 ‘약자’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할 수밖에 없는 엔도였지만, 그는 기베가 체험한 예수의 이미지에 “정말로 자신이 실감할 수 있는 예수”의 모습을 겹쳐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음의 글에서 우리는 이러한 주장의 정당성을 찾을 수 있다.

최초의 일본인으로서 예루살렘을 찾은 베드로 기베는 무엇을 생각하였을까? 나는 정말 그것이 알고 싶다. 그에 대해서 기베 자신은 아무것도 기록으로 남겨놓지 않았지만 이 청년의 마음에 예루살렘의 거리에서 예수의 죽음의 의미가 떠오르지 않았을리는 절대로 없다. 예수는 그가 사랑했던 자에게 배신을 당하여 죽었다. 예수는 그가 사랑했던 자들에게 생명을 바쳐서 죽었다. 기독교 신자라면 당연히 알고 있는 이 예수의 죽음의 모습을 처형장인 골고다의 흔적인 성분묘교회(聖墳墓敎會)에서도 반복해서 생각했다고 한다면, 그는 일본의 신도들을 버리고 여기까지 온 자신의 마음을 다시금 곱씹었음에 틀림없다. 그의 목적은 신부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신부가 되는 것은 예수를 본받는 것이고,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이다. 예수를 본받는 것이 신부의 사명이라고 한다면, 베드로 기베는 언젠가 일본 신도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신부가 된 그날부터 그의 운명은 분명히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는 박해받고 있는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잠복 선교사들과 함께 일본 신도들에게 용기를 주고, 그 괴로움을 위로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예수처럼 가혹한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예루살렘을 거쳐 로마에 도착한 기베는 1620년에 드디어 라테라노 대성당에서 신부 서품을 받는다. 그리고 그는 일본으로 돌아갈 결심을 굳힌다. “침략이라는 토대 위에서 포교를 행하던 교회의 실상”을 잘 알고 있는 기베였지만 “침략을 묵인하는 기독교 교회”는 “예수 자신의 가르침을 배반하는 행위”라는 사실도 그는 알고 있었다. 기베는 교회의 이러한 과오를 예수의 가르침 자체와 동일시하여 기독교의 현실과 본질을 혼동한 아라키 토마스나 치지와 미겔의 오류를 범하지 않고서, 오히려 “이러한 오해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외국인 선교사가 아니라 일본인 신부가 일본에서 포교하여야 한다.”라고 결심하게 된 것이다.

일본인 신부는 서구 기독교 교회의 과오와 예수의 가르침이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사실을 자신의 몸을 가지고 동포들에게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의 복음과 예수의 사랑의 사상은 이러한 서구 국가의 영토적 야심과는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것임을 위정자들에게도, 일본인들에게도 분명히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지금 일본인 신부의 의무이자 사명이다. 베드로 기베는 그러한 결론에 도달하였다.

“기리시단 박해 하에서의 일본인 신부의 사명이자 의무”에 눈을 뜬 기베는 “그가 평생에 걸쳐서 믿어온 예수의 죽음에 자신의 죽음을 겹치고자” 일본에 잠입하여 토호쿠(東北) 지방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하다가 관헌에게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으로 배교를 강요받지만 끝내 거부하고 순교하였다.

이처럼 베드로 기베는 마침내 죽었다. 1,600년 전, 그가 믿는 예수가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고 숨을 거두었던 것처럼. 다 이루었다. 주여, 모든 것을 당신의 손에 의탁하나이다. 기베의 죽음도 그러하였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수의 죽음 위에 겹쳐놓았다. 베드로 기베의 파란만장한 극(劇)은 막을 내렸다.

엔도는 ‘강자’로서 순교한 기베와는 달리 고통에 견디지 못하고 배교한 두 명의 도쥬쿠에 대해 기술하면서-그들은 배교한 후 기리시단 주거지에 유폐된 채 평생을 지낸다-다음과 같이 쓰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로도리코가 『침묵』에서 했던 말, 즉 “강한 자도, 약한 자도 없다. 강한 자보다 약한 자가 괴로워하지 않았다고 그 누가 단언할 수 있을까?”에 대한 반향을 듣게 된다.

그들[배교했던 도쥬쿠]은 자신들의 구원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렸다. 자신들은 신으로부터 벌을 받은 인간이라고 여기면서 매일매일을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의 여생은 문자 그대로 이 세상의 지옥이었을 것이다. 두 신부의 비참한 말로(末路)를 생각할 때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나온다. 어떤 신자라도 그들의 고민과 그들이 받은 처참한 고문을 생각할 때 비난이나 비판을 할 수 없으리라. 이 두 사람의 신부도 기베와 마찬가지로 신의 품에 안겨 있었다고 나는 믿고 싶다.

‘강자’인 기베가 발견한 예수. 그것은 고통받는 사람들의 ‘영원한 동반자’가 되어주시는 예수였다. 그러한 예수를 발견했기에 기베는 일본으로 돌아와 자신의 삶을 예수에게 바칠 수 있었다. 그리고 ‘영원한 동반자’ 예수는 “강한 자보다 약한 자가 괴로워하지 않았다고 그 누가 단언할 수 있을까?”라고 하면서 ‘약자’를 버리지 않으시는 예수인 것이다. 엔도가 기베와의 ‘거리감을 메우기 위해서’ 오랫동안 애씀으로 도달한 것은 ‘강자’와 ‘약자’를 모두 끌어안으시는 ‘영원한 동반자’로서의 예수의 모습, 곧 그가
『침묵』과 『예수의 생애』에서 발견한 그 예수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1) 長濵拓磨 「遠籐文学における" ぺドロ岐部"(ー): 『留学』 『沈默』 を中心とし て」 『遠藤周作研究』 第8号(2015年) 17頁以下。
2) 쿠니사키 반도는 오이타(大分縣) 현 북동부에 위치한 반도이다.

김승철 | 스위스 바젤 대학교(Universitat Basel) 신학부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부산신학교와 일본 나고야의 킨조가쿠인(金城學院) 대학의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는 나고야의 난잔대학(南山大學) 인문학부 기독교학과에서 가르치고 있다.

 
 
 

2021년 9월호(통권 75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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