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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신학 (2016년 5월호)

 

  검과 평화
  

본문

 

난세(亂世)는 영웅을 만든다. 시대가 어지럽고 문제가 심각할수록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일상적이지 않다. 그러니 남다른 능력을 가진 사람이 요구되는 것은 당연하다. 상황을 정리해줄 사람, 우리는 그런 사람을 영웅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돌아보면 인간 세상이 복잡하지 않았던 적이 없고 난제가 없었던 시절이 없으니, 인간 역사 속에 늘 있었던 것이 영웅이기도 하다. 우리의 역사 기록이라는 것이 실은 그 영웅들의 활약을 그려낸 것이 아닌가!
왕이나 장군이 어떻게 힘을 모아 문제를 해결하고 백성을 다스렸는지, 어떻게 한 영웅이 다른 영웅에게 권좌를 내주는지, 그 속에서 수많은 갈등과 대립이 어떻게 해결점에 이르는지, 역사는 어쩌면 수많은 사람들의 피 위에 세워진 한 사람의 승리를 전해주는 것인지 모른다. 물론 승리를 거머쥔 그 ‘한 사람’ 뒤에는 그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의 지지와 도움이 있었으니, 그것을 한 사람의 승리라고 말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모독이다. 그러나 역사는 ‘한’ 영웅을 도운 무명의 사람들의 이야기는 전해주지 않으니, 그들을 우리의 기억 속에 남겨두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환호는 늘 한 사람에게, 우리의 꿈을 실현시켜 줄 그 영웅에게 쏠린다.
우리의 판타지를 자극하는 영화들이 파고드는 지점도 바로 이곳이다. 영웅의 출현과 그의 통쾌하고 절박한 승리를 통한 대리만족 같은 것 말이다. 수많은 영웅 영화들이 나타나더니, 결국 그 영웅들을 한자리에 모아놓은 사이다 영화가 끝판왕으로 등장했다. 2편에서 서울이 등장하는 영화 <어벤져스>이다. <어벤져스>는 마블 시리즈에 등장하는 영웅들의 특별한 힘을 한데 모아 작렬시킨다는 면에서 극강의 재미를 선사한다. 에너지원인 ‘큐브’를 차지하려는 치타우리족의 침공으로부터 지구를 지키기 위해서 은밀하게 모인 반가운 얼굴들에 ‘어벤져스’(avengers)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영화의 의도를 충분히 드러내준다. 지구를 건드리는 자들은 씨를 말려버리겠다는 의지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이들이 지구를 지키는 사명을 완수하고 각각 흩어져 자신의 삶을 사는 모습을 보면, 즉 흔적도 없이 사라진 영웅들의 뒷모습을 보면, 진정한 영웅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더불어 이들이 지킨 평화는 어떻게 유지될 것인가, 하는 질문도 말이다. 영화의 말미, 이들을 믿지 못하는 정부는 도시에 핵폭탄을 터뜨리려고 하고, 어벤져스 중 하나인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분)가 그것을 막아내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어벤져스>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핵이나 영웅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에는 영웅은 없고 핵만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어벤져스> 유의 영화를 보다, 지구가 살아남을 것이라는 안도감만큼이나 도대체 이 끝나지 않을 싸움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불안감이 드는 것은 이 때문이다. 복수가 복수를 불러일으키며, 2편, 3편, 쭉쭉 계속되는 영화적 현실 말고, 우리들의 실제적 현실을 타개할 방법을 모르겠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무력(武力)에 대한 의존만이 안전을 보장하는 유일한 방법인 한에서, 불안한 마음을 달랠 수 있는 것은 판타지뿐인 현실이라니…. 우리는 얼마나 무력(無力)한가! 그러다 생각난 영화가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이다. <와호장룡>은 19세기 청나라 말의 혼란한 시대를 배경으로 한 무협 영화이다. 그러나 왕두루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와호장룡>은 일반적인 무협 영화와는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사랑 영화라고 이야기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영화는 단순한 사랑 영화가 아니라, 일종의 반(反)무협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의 큰 줄기는 무당파의 최고수인 이모백(주윤발 분)과 이모백의 사부를 죽인 푸른 여우(장패패 분)의 대립이다. 이 대립에서 무협 영화의 정신을 고수하는 쪽은 푸른 여우이다. 푸른 여우는 무당심결의 비법을 전수받아 고수가 되기 위해서 무당파의 사부인 강남학과 동침하지만 그에게서 버림을 받는다. 결국 강남학을 독침으로 죽이고 그 때문에 강남학의 제자인 이모백과는 원수지간이 된다. 무당파의 사부를 죽이고 쫓기는 신세가 된 푸른 여우는 옥대인의 집에 숨어들어가 허드렛일을 하면서 옥대인의 딸인 교룡(장쯔이 분)에게 무술을 전수한다. 그러나 교룡은 글을 모르는 푸른 여우가 깨우치지 못한 무당심결의 비법을 터득하고는 자신의 스승을 능가하는 실력을 갖게 된다. 이를 알게 된 푸른 여우는 자신의 제자인 교룡에게 ‘강호는 죽고 죽이는 곳’이라고 말하며 자신과 함께 가자고 유혹한다.
푸른 여우의 말은 틀리지 않다. 끊임없이 고수가 나오며 최강자를 겨루는 곳이 바로 강호의 세계이다. 그러나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강호의 세계에서 여자라는 이유로, 글을 모른다는 이유로 푸른 여우가 살아남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그녀는 결국 이모백을 독침으로 죽이지만 자기도 죽고 만다. 죽고 죽이는 것이 강호의 이치이니 당연한 귀결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화가 보여주려는 것이 이 ‘죽고 죽이는 세계’가 아님은 분명하다. 영화는, 이모백이 이러한 강호의 이치가 허망하다는 것을 깨달았음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사부의 죽음에 복수하지 못했다는 자책으로 파계했던 이모백은 이후 득도를 하지만, 그 순간에 느낀 것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었다. 그래서 그는 강호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자신이 사용하던 청명검을 떠나보내고자 한다.
그는 검이 자신에게 명예와 고통을 함께 주었다고 고백한다. 물론 영화에서 이모백의 고통의 한 끈은, 자신을 살리려다 죽은 사형의 정인인 수련(양자경 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검객의 철칙인 우정과 신의를 깰 수 없다는 것이 고통의 근원이다. 그러나 그의 또 다른 고통의 끈은, 수많은 사람을 죽인 검의 정당성에 있다. 정의를 위해서 검을 사용했지만, 그것이 과연 정의를 지키는 길이었을까? 마지막 숨을 다하여 이모백은 수련에게 “일생을 허비했소. 이제 말하리라, 평생 당신을 사랑했소.”라고 말한다. 이모백의 고백은 수련에 대한 사랑만이 아니라 검의 일생에 대한 회한이 함께 담겨 있다. 검으로 이룬 것에 대한 덧없음이다. 검은 사랑을 잃게 했고 사랑을 잃는다면, 결국 검의 가장 귀한 것, 명분을 잃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영화의 한 줄기는 이모백과 교룡의 담판으로 뻗어간다. 교룡은 자신의 검으로 자신의 삶을 마음껏 자유롭게 누리고자 한다. 그러나 그녀는 검의 능력과 자유에 대한 갈망만 가지고 있을 뿐,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대로 놔두면 교룡은 강호의 세계에서 ‘독을 품은 용’이 될 것이다. 이 때문에, 강호의 세계를 떠난 이모백은 교룡을 제자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이모백은, 검의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검이 주는 고통을 알지 못하는 자들, 단지 검이 주는 승리에 도취한 자들의 끝은 죽음뿐이라는 것을 안다. 이를 위해 감독은 이모백과 교룡의 대결을 대나무 위에서 아름답게 영상화한다. 흔들리는 대나무 위에서 꼿꼿하고 유연하게 교룡과 검을 겨루는 이모백의 모습 속에서 검의 아름다움은 극대화된다.
여기서 검은 왜 아름다운가? 자유자재의 움직임만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모백의 검에 피가 없다는 사실이다. 피가 묻지 않은 검의 아름다움, 죽이지 않는 삶의 평온함, 독을 빼는 이모백의 여백…. 이때 이모백은 말한다. “너 자신을 버리고 너 자신을 찾아라.” 영화는 검을 살생의 도구가 아니라 생명의 도구로 재탄생시키려는 듯하다.
물론 교룡에게 이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결국 자신 때문에 이모백도, 푸른 여우도 죽은 상황에서, 그녀는 사랑하는 소호(장첸 분)에게 “간절히 바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라는 말을 남기고 무당산에서 낙하한다. 살아서 느끼는 득도의 슬픔을 감당할 수 없었던 교룡에게 사랑은 다음 생의 일이 되었다. 죽음의 도구로 사용된 검의 무게가 교룡을 더 이상 자유롭게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묻게 된다. 검은 무엇인지, 자유는 무엇인지…. 낙하하는 교령의 미소나 대나무 위 이모백의 여유는, 평화나 자유는 검으로 얻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듯하다. 이렇게 강호의 허무를 드러낸다는 면에서 <와호장룡>은 반무협적이며 반‘어벤져스’적이다. 피에는 피, 무력에는 무력이라는 전의에 불타는 복수심을 가라앉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유를 얻는 다른 방법을 갈망하게 한다. “주먹을 꼭 쥐면 그 속에 아무것도 없지만, 손바닥을 펴면 온 세상이 그 안에 있다.”라는 사부의 말을 상기시키면서 말이다. 검을 반납하는 이모백의 득도나 차마 세상에 머물 수 없었던 교룡의 선택에는, 수많은 무명들의 죽음 위에서 얻은 영웅적 명예에 대한 고통스러운 인식이 깔려 있는 듯하다. 피로 가득 찬 주먹에 대한 회한이다.
죽고 죽이는 영웅에 대한 이야기를 보다 더 강하게 반격한 영화는 장예모 감독의 <영웅>이다. 이 영화는 매우 재미있게 구성되어 있다. 같은 사건을 세 개의 형태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곱 나라가 자웅을 겨루던 춘추전국시대 말을 배경으로, 대륙을 지배하는 첫 번째 황제가 되려는 진나라의 왕 영정(진도명 분)과 그를 죽이려는 세 명의 자객에 관한 이야기이다. 첫 번째 이야기는 영정을 죽이려는 모든 자객을 물리치고 영정 앞에서 선 무명(이연걸 분)이 자신이 어떻게 최후의 자객이 되었는지, 장천(견자단 분), 파검(양조위 분), 비설(장만옥 분)을 죽인 경위를 설명하는 내용이다. 무명은 자신이 먼저 장천을 죽였고, 다음에는 파검의 시녀인 여월(장쯔이 분)을 이용해서 비설이 질투로 말미암아 파검을 죽이게 한 후, 자신이 비설을 죽였다고 말한다.
무명의 이야기를 들은 영정은, 그토록 출중한 무예를 가진 자들이 그렇게 죽었을 리 없다며, 자신이 생각하는 두 번째 시나리오를 이야기한다. 영정은 무명이 장천을 죽인 것이 아니라 아마도 장천이 무명에게 자신의 목숨을 맡겼을 것이라고 말한다. 장천을 죽인 자는 영정의 20보 안에 들어올 수 있는데, 장천은 무명의 능력을 알아보고 무명이 영정에게 가까이 갈 수 있도록 스스로 죽어주었다는 것이다. 그만큼 무명의 무예가 뛰어나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파검과 비설을 죽이는 자만이 영정 앞 10보 안에 설 수 있기 때문에, 무명은 이 둘을 죽여야 했다. 무명의 검법은 10보 안에서만 힘을 발휘되기 때문이다. 무명은 아마도 비설과 파검을 진나라 군사들 앞으로 유인했을 것이고, 무명을 혼자서 상대하기 위해서 비설이 파검을 죽였고, 파검과 무명은 비설에게 바치는 결투를 했을 것이다. 무명은 파검을 죽이지는 못했지만 파검은 자신의 검을 무명에게 주었고, 자신이 할 일을 무명에게 위임했기 때문에, 무명이 지금 영정의 10보 안에 와 있게 되었다는 것이 영정의 추리이다.
영정이 자신이 꾸며낸 이야기를 믿지 않고 일의 대략을 추론하자, 무명은 세 번째로 일의 과정을 말하기 시작한다. 무명은 왕의 추론에서 파검에 대한 부분이 빗나갔다고 지적한다. 파검은 3년 전 비설과 함께 왕을 죽이려고 왔을 때, 충분히 왕을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파검은 왕을 죽이지 않았고, 그 일로 파검과 비설 사이가 벌어졌다. 영정을 죽여야 한다는 무명에게, 파검이 영정을 죽일 수 없는 이유로 쓴 글은 ‘천하’이다. 파검은 진나라나 조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백성을 살리기 위해서 검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파검에게 천하통일은 작금의 혼란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며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영정뿐이다. 그러므로 그는 영정을 죽일 수 없었다. 파검이 꿈꾸는 것은 검이나 무사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며, 파검은 그것을 영정에게 위임한다. 파검은 자신의 검을 무명에게 주어 무명이 영정 10보 안으로 갈 수 있게 하지만, 무명에게 영정을 죽이지 말 것을 권한다. 파검에게 ‘검’(劒)은 곧 ‘평화’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죽이려던 사람에게 자신의 목적을 이해받는 영정의 심정은 어떠할까? 무명의 이야기를 들은 후, 영정은 10보필살검법을 사용할 수 있는 무명에게 등을 보이며 파검이 쓴 ‘검’(劒)이라는 글자를 들여다본다. 그리고 그 ‘검’이라는 글자 속에서 살생이 없는, 평화의 의미를 읽어낸다. 그들 사이에 더 이상 살기가 감돌 수 없음은 분명하다. 무명은 왕이 부디 평화를 실현하기를 기원하며 그를 떠난다. 그러나 영정은, 왕을 노린 자는 죽여야 한다는 법을 실행할 것을 요구받는다. 무명을 죽이라는 압박이다. 결국 무명은 날아오는 화살을 맞으며 죽는다. 그리고 “무명은 암살자로 처형되었지만 영웅으로 묻혔다.”라는 자막이 나온다. <영웅>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보여주고 싶었던 모습은 영정과 세 명의 검객에게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여느 무협 영화와는 다르게, 죽이고 죽는 강호의 세계가 아니다. 세 명의 무사는 모두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기 때문이다. 영정마저 무명에게 자신의 목숨을 위탁한다. 그리고 그렇게 죽은 자와 산 자를 영웅으로 일컫는다.
<영웅>의 세 이야기 중 첫 번째는 가장 일반적인 영웅 이야기를 보여준다. 그러나 두 번째는 자신의 목숨을 무명에게 위탁한 장천의 이야기를 통해서 의외의 반격을 시도한다. 세 번째는 천하통일을 위해 자신의 검을 접는 파검과 무명의 이야기를 통해서 진정한 평화로 가는 길을 보여준다. <영웅>은 더 이상 무모한 죽음을 만들지 않기 위한 검객들의 행보를 통해서 영웅의 의미를 재조명한다.
‘죽는 영웅’의 모습을 그린 영화 <영웅>이나 <와호장룡>은 놀랍도록 재미난 <어벤져스>와는 분명 다르다. 어느 것이 더 좋은 영화인지, 어느 영화가 무고한 죽음을 덜 만드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들 영화에서 추구하는 영웅의 모습이 다른 것만은 확실하다. 한 쪽은 검의 세계에 깊숙이 들어가서 검 없이 이루어질 평화를 갈구한다. 다른 쪽은 더 세고 더 좋은 검으로 만들어낼 평화에 대한 찬란한 희망을 보여준다. 전자는 현실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보다 더 세련된 무기와 영웅을 만들어내는 후자가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와호장룡>이나 <영웅>은 검을 어떤 목적으로 써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한다. 스승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모든 것을 걸었던 이모백은 자신이 헛된 것을 좇았다고 말한다. 서예를 통해서 검법을 터득한 파검은 복수를 위한 연마가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말한다. 그러고 보면, 두 영화에서 검의 부정성은 바로 이 ‘복수’에서 나오는 듯하다. 복수는 복수를 불러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영화들을 보다 보면, 복수의 고리를 일찌감치 끊어낸 예수를 생각하게 된다. 예수가 잡혀가는 겟세마네를 그려보자! 무력(無力)한 예수와 무장(武裝)한 군사들 사이에서 제자들의 황망함을 말해 무엇할까! 그 순간에 제자들이 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러므로 예수의 제자 중 하나는 가지고 있던 칼로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귀를 베어버렸다. 날렵한 복수의 칼이었으리라. 그러나 예수는 말한다. “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쓰는 사람은 모두 칼로 망한다. 너희는, 내가 나의 아버지께, 당장에 열두 군단 이상의 천사들을 내 곁에 세워 주시기를 청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느냐?”(마 26:52-53, 이하 새번역)
예수는 힘이 모자라서 그들에게 잡힌 것이 아니다. 그들은 칼과 몽둥이를 가지고 왔지만, 예수에게 그 난폭한 무기들을 사용하지 못한다. 이유는 예수가 그들에게 자신을 내어주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잡혀주었다. 예수가 무기를 원했더라면 예수는 더한 힘이라도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스스로 그 힘을 포기한다. 예수의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평화를 얻는 방식으로 예수의 평화를 얻을 수는 없다. 예수의 평화와 세상의 평화가 다른 것은, 예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나의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나의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오. 그러나 사실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요 18:36)라고 말한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예수의 나라는 판타지인가? 예수의 나라가 판타지라면 예수의 방법도 판타지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나라는 판타지가 아니다. 예수의 나라는 이 역사 속에서 예수의 죽음 혹은 예수의 내어줌으로 구체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복수를 끊는다는 것, 칼을 포기한다는 것은 단순한 이상(理想)이나 꿈이 아닐 수 있다는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상은 끊임없이 외쳐댄다. “전쟁을 준비하여라! 용사들을 무장시켜라. 군인들을 모두 소집하여 진군을 개시하여라! 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고, 낫을 쳐서 창을 만들어라. 병약한 사람도 용사라고 외치고 나서라.”(욜 3:9-10) 그러나 이런 외침만 있었다면 어디서 평화의 얼굴을 볼 수 있었겠는가! <와호장룡>이나 <영웅>과 같은 영화는 이사야나 미가처럼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고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 않을’ 날을 꿈꾸며, 자신의 검을 내려놓는 영웅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영화적 판타지는 예수의 칼 없는 죽음에서 현실화되었다. 영화는 답답한 현실에 위로가 되지만, 예수의 삶은 무거운 마음을 안겨준다. 예수의 삶은 우리에게 이상이나 꿈이 아니라 현재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영웅 영화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어떤 영웅을 마주할 것이지, 영웅들의 평화가 어떻게 올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김호경 | 영화나 각종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성서의 의미를 확장시켜 보고자 노력한다. 그것이 성경과 삶을 연결시키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재는 서울장신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연세대학교 신학박사(신약학), 저서로는 『예수가 상상한 그리스도』, 『바울』, 『누가복음서』등이 있다.

 
 
 

2021년 9월호(통권 75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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