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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와신학 > 한국장로교 총회 100년, 그 빛과 그림자(8)
문화와신학 (2012년 8월호)

 

  한국 장로교 전통 단절 정체성 상실의 시대
  

본문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성립의 전후 관계

한국장로교 총회 역사 백년을 돌아보면, 이런 저런 역사적 명암을 살필 수 있다. 복음의 구현과 교회의 성립, 활발한 전개와 급속한 성장 등 드높여 칭송해야 할 영광의 역사도 가득하지만, 때로 그 깊은 치부를 드러내어, 역사가의 손으로도 감추고 싶은 면면도 없지 않다. 분열의 역사가 그러하며, 굴절과 오욕의 역사가 그렇다. 그러나 여기서 논하고자 하는 주제가 부끄러운 역사의 정점을 이룬다. 곧 한국장로교가 그 장로교가 아니었던, 정체성 상실의 시대가 있었다. 바로 ‘혁신교단’에 참여했던 때, ‘일본기독교 조선 장로교단’ 조직의 때, 그리고 교파통합의 ‘일본기독교조선교단’ 시절이 그렇다. 이 시대를 찬찬히 되뇌어 보는 것이 역사적 성찰에서 또한 의의가 있을 듯싶다. 가장 깊은 골짜기를 내려가 보는 것이 다시 산마루를 향한 대장정의 한 시작이라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1930년대 후반 이후 한국기독교 상황

조선교회는 외국선교사와 외국 선교기관으로부터 지도를 받고 그들에 의해 경영됨으로,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서의 기독교인을 함양하는 데 있어서 유감스러운 점이 많았다.
(柴原正一, “內鮮基督敎の團結と今後の對策に就て,”<基督敎世界>, 1938. 7. 21 中).
앞의 글은 당시 일본기독교의 논설가가 쓴 내용이지만, 이는 그대로 일제 말 조선총독부의 한국기독교 정책을 예고하는 내용, 그대로이다. 일반적으로 일제 말기 상황에서 한국기독교사가 특별히 주목하는 항목은, 신사참배의 강요와 그에 대한 저항, 훼절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그것은 그야말로 한 가지의 항목에 지나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한국기독교를, 서구 기독교의 세례로부터, 이른바 ‘일본화’하여, ‘황국(皇國)기독교’로 개편해 간다는 프로세스 안에 있었다. 이는 궁극적으로 ‘장로회’, ‘감리회’ 등의 서구기독교의 교파 정체성 자체를 가장 걸림돌이 되는 ‘브랜치’(branch) 구조로 보는 시각이었다. 이는 일본기독교가 줄곧 내부적인 신학적 작업으로 진행한 ‘일본화’ 과정, 국가의 목표로 지행했던 서구세력과의 대결과 전쟁불사의 분위기로 볼 때 용인할 수 없는 일일 뿐 아니라, 어떤 일이 있어도 극복해야 할 과제였다. 사실 한국과 일본의 기독교 역사를 더욱 면밀히 살펴보면, 특별히 한국기독교가 ‘신사참배’에 목을 매고, 극렬한 반대를 했던 것에 대해 일본기독교계나, 일본 당국이 이해하기 어려웠던 측면이 있다. 다시 말하면, 이미 일본기독교는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넘어섰고, 한국기독교도 일본기독교에 그대로 준해야 한다는 당연한 시대환경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보면, 간간이 자료의 행간에 등장하듯이, 일제 당국, 일본기독교계가 볼 때, 한국기독교가 신사참배에 저항하는 것은 진정한 성서적 신앙의 순수성에 기인했다고 하기 보다는 ‘민족주의적 저항’ 아니면, ‘서구 기독교의 조종’에 의한, 이른바 ‘불손한 의존 근성’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물론 신사참배 문제에 있어, 일본기독교도 나름대로 신앙적 극복과정을 겪어야 했던 것은 인정 할 수밖에 없고, 그 절대적 수용근거를 ‘신사비종교론’(神社非宗敎論)에 의거하고 있음은 자명하다. 그런데 자신들이 이를 넘어선 이후에도 한국기독교가 신사참배에 지속적인 반대 입장을 견지하는 이유를 미국 선교사들의 영향, 내지는 한국기독교의 서구교회 종속성에 혐의를 두고 있는 점에서 그 내막을 읽을 수 있다. 사실 당시 일본의 주류 기독교지도자들의 언급은 그대로 일제 당국의 한국기독교 인식, 혹은 그 정책의 바탕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미국선교부가 경영하는 한국의 장로교파 학교, 크고 작은 것을 합하여 115개교를 폐교한다는 성명이 나왔다. 폐교 이유는 ‘신사불참배’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되어 있다. 이 보도가 틀림없다면, 이것은 한국에 주재하는 미국선교사들의 일본 국민도덕에 대한 인식부족과 성서해석의 편협성, 혹은 그 잘못된 해석에 의거한 것이라고 믿고, 진정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山口德夫, “神社崇敬の聖書的解釋,”<日本メソチスト時報>, 1938. 7. 1 中).

이 야마구치(山口德夫)의 논설 행간에는 한국기독교, 특히 장로교가 신사참배를 수용하지 않는 원인, 그 배경으로 미국선교사들을 지목하고 있다. 여기서도 드러나지만 일제말기 당국과 일본기독교계는 한국기독교계와 미국 선교부를 철저히 이간시키고자 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그 가장 큰 명분은, ‘내선일체’(內鮮一體) 곧 구체적으로 말하면, 한국의 모든 것을 ‘일본화’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국의 다른 영역이나 부문은 한국의 전통적인 것을 지우고, 일본적인 것으로 덧입힌다는 방향으로 이 ‘일본화’가 진행되었다고 한다면, 기독교의 경우는, 거기에 녹아있는 서구적, 미국적인 것을 걷어 냄으로써, ‘일본화’해 나간다는 방향성이 작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한국기독교계와 서구 선교사들 간의 이간책의 한 증거 결과는 신사참배 파동이후 선교사들에 의해 폐쇄된 장로교계 미션스쿨들이 몇 단계의 과정을 거친 다음 거의 재건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미국선교사들의 독선적 경영을 비난하며, 철저한 일본화 정책을 수용한 한국기독교 인사들에 의한 인수 경영의 형태이다. 이는 일제 당국으로 볼 때, 선교사들의 입김만 걷어내면, 한국기독교도 이미 일본기독교가 같은 길을 걸었듯이 ‘일본적 기독교’의 목표를 성취할 것이라는 신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한국기독교에 대한 최종적인 형태적, 내용적 변형 목표는 서구, 특히 미국기독교의 교파주의적 특성을 지니고 들어 온 기독교를 ‘일본화’하는 작업, 곧 여기서는 교파적 색채를 무력화하는 것을 통해 그 ‘선교 텍스트’를 부정하는 방향에서 ‘일본화’를 추진하는 것이었다. 이는 이미 일본기독교 내에서 실험되고, 추진되어 온 모형을 그대로 사용했다. 이에 관한 일본의 전철(前轍)에 대해서는 별도의 기회에 상술하고자 한다.
즉 이러한 일제 말기의 ‘일본화’를 모토로 한 기독교 정책의 산물로, 한국장로교는 급기야 장로교를 부정하는 정통성 상실의 시대를 겪어야 했다. 이는 단순히 수난기의 한 상황으로 치부하고 넘어 갈 수도 있지만, 일제의 강고한 공작이 있었다고 해도, 한국장로교의 주체적 리더십에 의해 적극성을 띠고 전개된 왜곡 부분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 볼 여지가 충분히 있다. 더구나 한국장로교 총회 설립 100주년에 즈음한 역사적 성찰에서, 그 형태와 명분으로도, 실제로 표명된 정강으로도, ‘장로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한 시기, 급기야는 교파를 통합하여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까지 나아간 부분은 더욱 진지하게 집고 넘어가야 할 역사적 굴곡이 아닌가 한다. 즉 한국장로교 총회는 그 100년 역사 안에, 공식적으로 장로교 아님의 역사, 상실의 시대를 분명히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 현재의 다수 한국의 장로교 총회들은 어떤 회고와 반성을 표명하고 있는지는, 필자가 과문(寡聞)하여 다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신사참배를 공식 가결한 한국장로교 총회
1930년대 초반까지만 하여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해 장로교회는 강력한 반대 입장을 견지했다. 총회차원의 반대 입장이나 헌의도 있었으나, 역시 장로교 선교부의 입장은 이 문제에 대해 대단히 강경한 자세를 지켜나갔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인 미국남장로회 선교부의 이른바 ‘풀턴(Fulton)선언’이다. 사실 풀턴(C. Darby Fulton)은 재일본선교사의 2세로 누구보다 일본의 종교전통이나 기독교 상황을 잘 아는 선교사였다. 물론 ‘풀턴선언’은 주로 ‘신사참배’ 강요 상황에서 선교부의 세속교육 사업에서의 ‘인퇴’문제를 다룬 내용이기는 해도 한국장로교의 신사참배에 대한 입장 확립에서 중요한 기준으로 등장했다. 주요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기독교 교리를 수정하지 않고는 우리 교육 사업을 계속할 수 없을 것 같은 최근의 사태 발전을 고려하여, 우리는 마지못해 우리 한국 선교부에 적절한 절차로 우리 학교를 폐쇄할 조치를 취할 것을 지시한다. (‘풀턴선언’, 제4항)

이러한 선교부의 입장을 놓고, 지금까지는 대개 신앙노선의 보수성과 관련시켜서만 이해해 왔다. 상당 부분 적절한 분석이다. 그런데 이를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면, 얼마나 교파적 정체성에 충실하였는가 하는 요소로도 살필 수 있다. 한국 내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학교 폐쇄 결정을 내린 교파는 ‘장로교’로서, 세부적으로는 북장로회, 남장로회,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이다. 반면 장·감연합 상태였던 캐나다교회 선교지역, 가톨릭, 감리교, 안식교, 성결교, 구세군, 성공회 등은 장로교 총회에 앞서 모두 신사참배를 용인하였다. 신사참배를 받아들인 것은 신앙의 정절을 포기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으나, 그 보다는 ‘교파적 정체성’을 포기하고 이른바 ‘일본화’라는 신학적 변증을 인정하는 태도로도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신사참배가 일본의 초종교적 가치인 ‘국가신도’를 예외 없이 존숭하게 하여, 기독교 본래의 신앙적 권위나 순수성을 유린하고자 하는 목표도 있었지만, 서구 기독교의 지역 브랜치로서의 이미지가 강한 교파정체성을 부정하고자 하는 의미도 있었던 것이다.
‘일본화’라는 것은 일본의 전통가치를 기독교 신앙 프로세스 안에 용해시키는 것이었으며, 그것을 통해 서구의 문화 전승이 기독교 신앙과 습합된 산물로 보는 교파 전승을 부정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일본이 이 서구기독교의 교파성에 얼마나 민감하였는지는 여러 측면에서 엿보이는 증거가 있다. 그 중에서도 서구 기독교와 현상적으로, 실체적 조직으로 더욱 일체화된 교파조직에 대해서는 더욱 민감한 반응을 보인 바 있다. 일본에서나 한국에서나 세계교회 일원적 조직 형태였던 구세군, 그리고 영국국교회와 깊이 연결되었던 성공회 등에 대해, 그 교파 정체성을 말살하기 위한 별도의 요구를 하고 있는 것에서도 예를 찾을 수 있다. 결국 파시즘 절정기 일본 당국의 기독교 정책은 내용적으로는 ‘임박한 종말론’이나, ‘재림사상’과 같은 피안성(彼岸性), 형태적으로는 서구 기독교의 교파성체성의 유지 여부에 민감하게 집중되어 있는 것을 살필 수 있다. 이러한 측면을 상세히 부연하는 것은 결국 일제 말 신참참배 문제를 좀 더 너른 틀에서 이해해 보아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서 한국 장로교는 그래도 어느 교파보다 신사참배 문제에 대해서 끝까지 반대 입장을 견지해 나갔다. 그러나 총회의 가결이전 각 노회들이 하나씩 신사참배를 용인해 나가기 시작하는 분위기였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장로교의 치리조직으로서 ‘노회’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1938년 9월 제27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할 당시 이미 전국의 27개 노회 중 19개 노회가 노회차원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한 상황이었다.

아등(我等)은 신사가 종교가 아니오,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하지 않는 본의(本意)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며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率先) 려행(勵行)하고 추(追)히 국민정신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 하에서 총후(銃後)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서 적성(赤誠)을 다하기로 기함. 昭和 13(1938)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홍택기.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제27회 회록』, 1938, 9쪽)

기독교 학교들에 대한 신사참배 강요를 통해 장로교 선교사들의 학교경영 일선에서의 인퇴를 유도하고, 이를 기반으로 서서히 교회조직 자체에 대한 강요 절차로 이어진 것이다. 당시 장로교의 경우, 이미 교회조직은 거의 한국기독교인 중심의 주도력에 의한 조직 운영이 완결되었고, 학교 등 기독교 기관의 경영에는 선교사들의 관여가 아직도 깊숙이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일제는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다. 간혹 혹자는 왜 신사참배 강요의 순차가 학교로부터 교회로 이어졌는지를 의문시하는 경우도 있다. 즉 신사참배 강요에서 교회에 대한 직접적 강요가 먼저 이루어졌다면, 일거에 전체에 대한 제압이 가능해졌을 것이라는 가정에서이다. 이는 물론 바깥으로부터의 압제 망을 좁혀 들어갔다는 의미도 있으나, 달리 해석할 여지도 얼마든지 있다. 즉 장로교회로 예를 들면, 노회나 총회 조직은 이미 한국인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고, 그들에 대한 ‘일본화’는 ‘내선일체’의 명분으로 보나 당시의 시국 환경으로 보나 더 용이한 일로 여길 소지가 있다. 일제 당국에 있어서 선교부가 직접 경영하고 있던 다수의 미션스쿨은 ‘일본화’ 작업, ‘교파성’ 제거, 궁극적으로 서구 선교사들의 인퇴까지 몰고 가야함에 있어 가장 강력한 승부처가 아닐 수 없었다. 예상대로 앞선 학교에 대한 신사참배 강요로 특히 장로교의 경우, 선교사들이 학교경영에서 퇴진하였고, 협력적 성향의 한국인 기독교인들에 의해 학교를 재개함으로 외연조직의 ‘일본화’는 가능해졌던 것이다.
아무튼 한국장로교는 공식적으로 총회차원에서는 가장 늦게 신사참배를 가결했다는 나름대로의 명분도 무색할 정도로 그 이듬해인 1939년 9월의 제28회 총회에서 정인과(鄭仁果) 목사를 ‘총간사’로 하는 ‘총회중앙상치위원회’를 설치하고, 교단의 ‘일본화’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국체(國體)의 본의(本意)에 기하여 당국의 지도를 준수하고, 국책에 순응하여 과거의 구미(歐美) 의존적 사념(邪念)을 금절(禁切)하고, 일본적 기독교의 순화(純化) 갱정(更正)에 노력하는 동시에 교도(敎徒)로 하여금 그 직에서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성(誠)을 봉(奉)하여 충량(忠亮)한 제국신민으로서 협심육력(協心戮力) 동아(東亞) 신질서(新秩序)의 건설에 용왕(勇往) 매진키를 기함.
(“일본적 기독교로 발족 장로교 획기적 새 출발,” <每日申報>, 1940. 11, 10면).

이것은 총회 중앙상치위원회가 주도하여 발표한 지도 원리의 골자인데, 이미 살핀 여러 측면의 해석이 다 녹아 있다. 즉 당시 일제의 강요와 핵심 지도력에 의해 주도된 한국기독교, 특히 장로교의 개편의 핵심은 ‘일본화’였다. 당시의 시대가치에서 가장 근절되어야 될 항목은 ‘구미 의존성’이다. 이것을 ‘사념’(邪念)이라고까지 표현하였다. 이 ‘구미 의존’이라는 것은 선교사에 의한 주도권의 문제나, 신학적으로 서구신학 지향의 문제 등도 있을 수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장로’, ‘감리’와 같은 교파성의 존속문제였다. 이것을 제거해야만 기독교도 동아시아의 신질서, 곧 서구 여러 나라와 전쟁까지 불사할 일본 주도의 새로운 세력판도에 말석이나마 동참할 수 있는 요건을 갖출 수 있다는 것이 당시의 시대 사조였다.

‘혁신교단’,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그리고 ‘일본기독교 조선교단’
1937년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공식 가결한 이후의 행보는 재빨라졌다. 총회 후 총회임원들과 산하 노회대표들이 평양신사를 참배하였고, 바로 그 이듬해 총회에서는 상치위원회를 설치하여, 정인과 목사 등의 주도로 ‘일본화’ 작업에 박차를 가해 나갔다. 결국 여기서 일관되게 등장하는 문제는 교파성의 재고(再考)이다. 구체적으로 당시 한국 기독교의 양대 교파라고 할 수 있는 장·감이 주도가 되어 교파통합의 방향을 추진해 나가는 것이다. 이에 대한 지침은 조선총독부의 정책방침 중 기독교에 대한 지침에서 이미 구체적으로 예시되어 있다.

조선에서 기독교는 이제야 우리나라(일본) 미증유(未曾有)의 시국 하에서 새로이 일본적 기독교로 형식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180도 전향을 보이고 있다. 포교 50년의 역사와 전통은 물론 하루아침에 이를 벗어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 벗어버릴 때에도 수많은 마찰이나 장애의 발생을 예상치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이 시국 하에서 조선기독교에 부과된 절대적 사명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변 하에서의 기독교” 「朝鮮」, 朝鮮總督府, 1838. 11 중)

‘일본적 기독교’로의 이행은, 곧 교파를 극복하는 일로 연결되고 있었다. 1942년 1월 ‘교파합동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해 1월 새문안교회의 회합에 장로교 대표 19인, 감리교 대표 9인, 성결교 4인, 일본기독교교구 대표 4인, ‘구세단’(구세군의 새로운 이름) 대표 4인이 모였다. 역시 여기서 참고가 된 것은 이미 합동 교단 실현에 성공한 ‘일본기독교단’의 사례였다. 여기서 교파합동의 전초로서 혁신안을 마련하는 책임을 감리교가 맡았다. 그런데 여기서 결국 일시적 ‘마찰’이 일었다. 당시 일본 당국이 지극히 싫어하는 기독교 전승의 한 측면이 ‘구약’의 전통이었다. ‘유대 민족주의’에 유비된 구약적 메시지를 극도로 기피하는 터였다. 이미 한국 식민통치 초기로부터 구약 중심 메시지가 자주 등장하는 한국기독교의 신앙 양태에 대해, 일본기독교인들의 입장을 빌려, 초보적, 유치한 신앙양태로 비판했던 전력도 있는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아무튼 이러한 분위기에 충실한 감리교 측은 교회 혁신안에서 구약성서 대신 사용할 <해석교본>을 마련하고, 그것으로 교인들에게 구약성서 대신 강독시킬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이는 타 교파 출신 대표들의 넓은 지지를 얻지 못했다. 역시 총독부가 벌써 예상했던 ‘마찰’이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역으로 반발한 감리교 측이 위원회에서 탈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감리교는 당시 장로교 경기노회 부노회장이던 전필순 목사를 영입하여 통리로 추대하고, 새로운 ‘혁신교단’을 출범시켰다. 이는 큰 사건이 되었다. 장로교 목사가 자파(自派)는 참여치 않은 채, 감리교가 추진한 혁신교단의 대표자가 된 것이다. 이는 경기노회 내부에서부터 문제가 불거지고, 장로교는 전필순 목사를 탄핵하였다. 감리교도 자신들의 무리수를 인정하고, 혁신교단을 해체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는 중간단계로 장·감 각 교파는 개별적으로 교단별 ‘일본화’ 과정을 밟았다. 이에 1943년 5월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이 출범하였다. 이것이 중간적 단계이며, 어색한 명칭임은, ‘일본 기독교’ 내에는 이미 ‘장로교 정체성’의 교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즉 일본기독교에는 장로교 전승을 지니고, ‘일본기독교회’(이른바 ‘닛기’[日基])라는 교파가 가장 유력한 교파로 존재해 왔으나, 이미 1941년 6월 24일 ‘일본기독교단’으로 통합되면서, 명실상부 일본기독교에서의 장로교파는 사라진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장로교가 자신들의 공식 교파의 명칭을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으로 표명한 한 것은, 그것이 일시적 조직이거나, 모순된 정체성인 것을 내포한 것이었다. 결국 이 교파는 장로교 정체성을 완전 부정하며, 이른바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이행될 전초였다고 보는 것이 더욱 정확하다.
일제 당국과 일본교회는 미완성 단계, 곧 한국교회에서 ‘교파성’을 제거하는 일본화 작업의 미완 상태인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의 상황을 ‘조선교회의 개혁실패’로 보고 있었다. 이는 ‘교파성’을 제거하기 위해 추진하던 ‘연합교회’ 설립 좌절을 일컫는 말이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직접 나섰다. 1945년 6월 최고위 관리로 볼 수 있는 정무총감이 각 교단 대표를 초치(招致)하여 당국의 입장을 피력하였다. 이는 권고수준이 아니라 추진 명령이었다. 이에 연합교단 설립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준비회의를 거쳐 1945년 7월 19-20일 각 교파대표 59명이 대의원으로 참석하여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을 창립했다. 이 교단의 초대 통리는 장로교 김관식 목사가 임명되었으며, 출범과 함께, 각 교단 대표들은 공식적으로 자기 교파의 해체를 선언하였다.
이 ‘조선교단’은 업무개시가 1945년 8월 1일이었다. 그리고 15일 후 해방을 맞았다. 실제로 이 ‘교단’ 창립과 함께 선언, 추진된 것은 그해 8월 31일까지 각 교단은 자파 교회 소유의 모든 재산권을 이 ‘교단’으로 이양하고, 명실상부한 합동교회를 운영해 나간다는 원칙하에 업무를 개시한 바 있다. 그러나 8월 15일의 해방으로 이는 구체적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규정으로만 보면, 한국장로교의 정체성 상실, 장로교단의 정체성 위기의 공식적 기간은 딱 15일 동안으로 볼 수도 있다. 물론 그 이전에 각 노회의 해체,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의 정체성 문제, 더 거슬러 신사참배를 가결한 총회가 지닌 아이덴티티 파열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그 상실의 시대는 더 길어진다. 더구나 해방 후, 일부에서 추진되던 ‘조선교단’의 존속운동과 ‘남부대회’, 실제로 각 노회가 재건될 때까지를 따지다면, 그 상실의 기간은 더욱 연장된다. 아무튼 이 시기 한국에는 장로교회가 없었다.

여언(餘言)
한국장로교 역사에서, ‘장로교회’로서의 정체성이 상실 될 뻔 한 역사적 시기는 딱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추진되다가 중도에 폐기되었고, 한 번은 짧지만 그 상실이 실재가 된 경우이다. 그 처음 한 번은 선교사들이 스스로 나서서 추진한 일이었고, 한 번은 일제 당국과 일본기독교 인사들의 관여에 의해서이다. 한 번은 ‘한국의 단일 토착교회’를 세운다는 명분이었고, 다음의 경우는 ‘일본적 기독교’를 성립시키는 명분이었다. 1905년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지만, 언더우드(H. G. Underwood) 등이 중심이 되어 ‘한국기독교회’를 세우고자 하여, 한국 선교에 참여하던 프로테스탄트의 선교사들이 그 공의회에서, 심지어 ‘만장일치’로 이 안을 가결한 바 있다. 복음주의적인, 교파 구별 없는 한국 단일기독교회의 이상, 이것이 당시 상황에서 한국 선교를 감당하던 선교사들의 ‘콘텍스트 인식’이었고, 이를 필자는 ‘선교 에큐메니즘’의 정점(頂點)으로 불렀다. 이때야말로 단일 한국교회가 수립되었으면 참으로 좋았을 시점이었고, 역사적 평가도 높이 받을 수 있는 여건이었다. 당시 초대 한국교회의 상황에서 교파적 전승보다는 연합하여 기독교회를 수립하는 것이 어떤 측면에서 보아도 바람직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는 현실적 장벽에 의해 좌절되었다. 즉 각 선교교파 본부의 인식과 현지 선교사들의 인식 간에 큰 격차가 있었던 것이다. 장·감 각 교파가 선교사를 파송할 때의 목표는 역시 자파 교회의 수립에 있었다. 그것은 훗날 일본기독교와 일제 당국이 민감하게 의식한 서구 교회의 ‘교파 브랜치 의식’과도 상통하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이러한 과정에서 ‘단일교회 성립’은 와해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역동성은 한국교회 안에 두 가지 큰 ‘에큐메니즘’의 영향력은 남겨 놓았다. 적어도 같은 장로교회라면, 장로교회끼리는 연합하여 하나의 한국장로교회를 수립하게 하는 동력이었다. 이것은 감리교나 다른 교파들에도 작용한 힘이다. 그리고 교회를 교파별로 설립하는 일 이외에, 성서, 찬송가, 문서, 교육, 의료, 청년 분야 등등 직접적인 교회 수립 이외의 영역에서는 각 선교 교파가 합동하여 사업을 추진하도록 하는 분위기를 조성한 것이다.
 그 다음으로 살필 수 있었던 상황이 곧, ‘일본적 기독교’의 단일교회 설립이었다. 이는 단일 교회라고 하는 ‘에큐메니즘’의 가치로는 여전히 유효한 점이 있을지 몰라도, 그 목표와 추진 목적 자체가 일제의 기독교 정책, 부당한 정치권력에 의한 교회 이용이라는 과정이 개제된 것이며, 한국기독교로 볼 때는 가장 굴욕적인 내용이 가미된 것이었다. 이는 ‘에큐메니즘’의 가치를 아무리 중요하게 여긴다고 하여도 도무지 용인할 수 없는, 부일 극치의 결과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해방 후 ‘조선교단’을 주도했던 인사들이 그 ‘에큐메니즘’의 가치를 명분으로 ‘교단’을 유지해보고자 하는 시도를 집요하게 했으나, 이는 태생적으로 불가능한 명분이 아닐 수 없었다.
 
‘일본적 기독교’와 ‘서구 교파주의 교회’의 정체성 갈등으로 압축되는 일제 말 한국기독교 상황은 단순히 신앙적 순수성을 유지했는가의 여부, 특히 구체적으로 신사참배를 했는지 여부 등에 따라 신앙의 ‘보혁’ 수준을 가늠한다는 것은 역사적 분석의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것은 곧 더욱 정치적인 상황인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즉 일제 초기와는 달리 일본의 파시즘 국가는 서구와의 대결 구도를 더욱 확장시켰다. 종국에는 서구와의 전쟁 상황으로 이행되는 시점이다. 일본기독교는 일단 앞서서 이 문제를 직시하여 서구 교회에 의해 선교된 교회로서의 교파적 정체성 극복에 부단한 대응을 해 왔다. 그리고 마침내 교파 구별 없는 ‘교단’을 추진해 나갔다. 그러나 한국기독교의 경우, 민족적 동기뿐만 아니라 미국 선교부의 주도적 역할도 함께 있어서, 교파 성향 교회를 유지하는 동력이 더 강하였다. 결국 당시 구도에서 한국장로교가 언제까지 그 교파 정체성을 유지하느냐가 항일의 증거로 작용한 시대이다. ‘항일(抗日)적인 것이 장로교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었던 특수한 시기였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한국장로교가 장로교가 아니었던 기간이 비교적 짧은 시간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에큐메니즘’의 가치가 오히려 아주 낮아지고, 그 보다는 교파주의의 유지가 크게 바람직했던, 일정한 시기의 특수성이 거론될 수 있는 독특한 시대였다.

서정민 l  교수는 일본 도시샤(同志社)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연세대학교 신학과 교회사 교수를 거쳐, 현재 일본 메이지가쿠인(明治學院)대학교 객원교수이다.

 
 
 

2019년 3월호(통권 7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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